생각들

이 세상에는 인간이 너무 많다.


인간들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재화를 소비한다.


그리고 이 재화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는 사실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붕괴해야 한다.


나의 공상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붕괴하기 위해서는 "재화의 가치" 가 붕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재화가 무한정 무제한 생산되어 흘러넘치는것, 그리고 그 재화의 "수요" 자체가 현격하게 감소하는 것.


이상적인 것은 전자이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최소한 현세대 과학으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애초에 지구의 자원 자체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인간의 모든 생산/소비활동은 환경을 파괴한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수십억의 인간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원이 넘쳐난다고 해도, 그 자원들을, 모조리 소비한다면 지구는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후자에 없다.


후자의 방법, 즉 수요가 줄어들도록 하는 방법 또한 두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로 그 수요를 발생시키는 집단 자체의 수를 감소시키는 것


둘째로 그 잠재적 수요원들의 "욕구" 자체를 감소시키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이러한 결론이 도출된다.


"현재 인류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가진 1%만을 남기는 것".


(여기서 최근, 필자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전 세계 약 70억의 인간들 중에 상당수는 기준 미달의 지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조건을 세밀하게 변경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추가되어야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문명과 사회, 문화를 갖춘 선진국의 수준을 기준으로".


만약 전체 인류를 기준으로 1%를 추려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30~50% 이상의 인간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저러한 기준을 추가할 경우, 우리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0.5~1% 정도의 인간들이 추려질 것이다.


아마 그 숫자는 1000만~3000만 이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1000만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단순히 인간의 수를 감소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 인간들이 아무리 소수라도 욕구는 그대로이고, 특히 극소수의 재화에 대한 소유욕은 여전할 것이다.


따라서 저 "욕구" 자체를 필연적으로 조절해야 하는데,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지성의 현저한 발전"밖에 없다.


이를 통해 각종 기술, 예를 들어 인간 자체가 필요 없는 완전 자동생산 체계 등을 갖춰서 재화를 효과적으로 생산하고, 한편으로 "재화"를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즉, (모든 구성원에게 충분한 재화의 생산을 통해 저급한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더불어서 지성의 성숙을 바탕으로) 모든 인간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닌, 학문/예술/문학/철학/정치/자아실현 등의 정신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인류의 수준이 현격하게 발전해야만 한다.


현존하는 모든 인류, 즉 가장 저열한 지성을 보유한 인간들까지 모두 현존 인류보다 한 차원 높은 지성의 발전을 이루려면 상상도 못할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하다.


명백하게 심각할 정도로 비효율적이며 비현실적인 행위이다.


또한, 그렇게 정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정작 충분히 먹고 살 정도로 재화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저급한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인간은 위와 같은 높은 욕구를 추구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지구를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않는 한 이는 불가능할 뿐더러, 쓰레기통으로 만들 정도로 자원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인류를 동반하여 이를 달성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극소수만 남겨서 달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극소수 또한 무작위로 추출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지성을 보유한 자들이어야 한다.


현존 인류 중 가장 높은 지성을 보유한 1000만명 정도만이 남는다면, 위에서 말한 대로 한 차원 높은 인류의 수준을 달성하는 것 또한 공상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너무 많다.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절대 다수가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어차피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무가치하다. 똑같이 무가치하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보다는 선택받은 소수만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본 필자의 지성은 형편없기 때문에, 당연히 본 필자 또한 말살의 대상이다.


본 필자는 필자가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상세계를 경험해야 한다던가 하는 미련이나 욕심은 없다.


그러한 이상세계에 있어서는 필자와 같은 저열한 지성을 보유한 인간들은 필요 없는 방해물에 불과하다.


어차피 삶과 존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가치하다.


필자와 같은 무가치한 DNA와 단백질 덩어리들이 소멸함으로써 남은 극소수의, 높은 지성을 가진 존재들이 건설하는 이상사회의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무가치한 인생에게 있어서 유일한 최선의 의미 있는 행위일 것이다.


필자는 그렇게 죽는 순간, 꿈을 꿀 것이다.


1%의 위대한 존재들이 건설하는 공산주의 이상향을.


그러한 희망을 안고 죽는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필자의 보잘것없는 삶을 통틀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지금도 그러한 희망을 갖고 있다.


저능한 필자조차 간단한 생각만으로 도출할 수 있는 명쾌한 결론을,


위대한 지성을 보유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그러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그 날만을, 염원하고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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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19 16:18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국정원 2016.04.02 12:16 신고

    똑똑똑 안녕하세요?

보통 상대주의를 깔 때 혐오할 수 있는 권리를 들면서 모순점을 지적하곤 한다. 특히 필자의 주요 관심분야인 음악 평가에 있어서도, "깔 수 있는 권리"를 내세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보통은 궤변 취급을 당하면서 무시당하지만,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나름 논리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름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 바에 따르면, 일단 "혐오할 권리" 자체는 존재하는 게 맞다. 오히려, 혐오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상대주의에 대한 모순이고, 기본권(헌법)적으로 따지면 사상의 자유에 침해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혐오"는 심지어 논리적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즉 사회적 차별이나 인종간 혐오 등도 기본적으로는 무조건 허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사상의 자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공산정권을 찬양하거나 김일성을 찬양할 권리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맞고, 반대로 NS 사상을 신봉할 권리도 존재하는 것이 맞다. (현행법에 따르면 이와 같은 행위는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국가보안법이 전근대적이고 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임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사상을 신봉한다는 것이, 비록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사상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이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상" 또한 가질 자유도 존재한다.)


물론 음악 평가 같은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모든 앨범을 동등하게 존중해 준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위이다. 누구나 듣기 싫은 똥반이라고 생각하는 앨범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앨범을 - 홍길동이 호부호형 못하듯이 - 구린 것을 구리다고 말하지 못하고 강제로 좋다고 하거나 "그건 그것 나름대로 가치가 있겠죠" 식으로 넘어가야 한다면, 이것 자체가 개인의 사상의 자유와 가치를 무시하는 비상대주의적인 행위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저러한 "존중의 강요"는 그 자체가 상대주의와는 상충되는 행위라는 점이다.


(즉, 가치의 상대주의를 무시하는 절대주의나, 상대주의의 탈을 쓰고 "무조건적인 존중을 강요" 하는 사상이나 결과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중의 강요는 상대주의가 아니고, 따라서 이는 모순이다. 혹자는 "강요가 아니라 권유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처럼 "혐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비난한다면 이는 강요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상대주의에 따르면 혐오할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이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당연하게도,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즉,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혐오할 권리가 존중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자면, 개인이 어떠한 것을 혐오하는 것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어떠한 것을 혐오할 것을 강요하거나, 타인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혐오를 현실에서 추구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는 존중받을 수 없다.


즉, 예컨대 누가 인종차별을 바탕으로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적 혐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외국인을 혐오할 권리는 존중해야 하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치관을 무시하고) 외국인을 혐오할 것을 강요하거나 겁박하여 외국인을 강제로 혐오하도록 만들고, 또는 자신의 혐오사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길거리에 나와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주의 사상에 따르더라도 존중받을 수 없다.


이를 음악 평가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앨범을 구리다고 욕하거나 그것이 구리다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물론 이와는 전혀 별개로,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부실할 경우 이를 바탕으로 그것을 논파하여 비난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권리는 당연히 존재한다. "존중한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사상의 자유를 추구할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이지, 그 결과물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 넘어서서 다른 게시판 등에 쳐들어가서 이 음악은 폴스이니 들으면 안 된다는둥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강요행위를 시도하면서 깽판을 치거나, 소위 "도장깨끼" 라고 해서 메탈킹덤 같은 데 쳐들어가서 사이트를 작살내 놓거나, "폴스" 밴드들 앨범 관련해서 온갖 트롤링을 시도하거나 하는 행위는 당연히 병신스러운 행위이고 지양해야 함이 마땅한, 존중받을 수 없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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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047&aid=0002094654


(원문기사를 퍼오지 않은 이유는 광고도 혐오스럽고 댓글도 막장이라서)


오늘 복날이라 그런지 시기적절하게도 저런 기사가 나왔는데,


이런 종류의 글에 대해서 크게 할 말은 없지만 기사 도중에 "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이지 않아도 된다." 라는 문구가 있어서 그것때문에 이 글을 간단히 써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소위 "감성팔이"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긍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가시적인 성과를 낼 지 모르지만, 논리와 정당성이 결여된 프로파간다는 장기적으로 갈수록 명백히 독이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논리"와 "근거"를 갖춰야만 하고, 명백히 그것만이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초석이다.


사회의 제도나 공동합의는 논리적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근거기반이 매우 취약해지기 때문에 간단한 공격으로도 무너질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화제일수록 논리성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사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자면, 개를 식용으로 삼는 행위 자체는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비난할 수 있는 행위는, 위 사례와 같이 주민들과 잘 어울리던 개를 지가 쳐먹기 위해서 "훔쳐가는" 등의 행위이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는 저 개가 주인이 없는 개라는 점인데, 애초에 현행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길거리 동물을 무단으로 잡아먹는 미개한 행위는 위생적 이유 등등의 이유로 인해 금지해야 함이 마땅하다.


엄연히 보호 대상인 유기견을 무단으로 식용으로 팔아먹는 행위 자체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난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개를 식품으로 섭취하는 행위" 그 자체에는 "옳다/그르다"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인의 논리적 추론에 따른 결과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 차원에서 혐오할 수는 있더라도 이를 사회적 합의로 끌고 와서 "Right/Wrong"의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행위는 논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말 할 것도 없이,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동물도 인간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는데, 인간들은 그 동물들을(당연히 같은 인간은 제외) 자신들을 위해 무작위적으로 잡아먹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육식행위는 잘못된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 "개"라고 하는 종이라고 해서 특별취급 받아야만 하는 "논리적인 이유"가 빈약하다.


물론 동물 뿐만이 아니라 식물에게 있어서도 같은 논리를 들이댈 수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 중의 하나가 바로 식물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살아있는 무언가를 죽여서 섭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구조로 진화되어 왔다. "지능"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식용으로 삼는 많은 동물들의 지능이 의외로 상당한 수준이라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로 증명된 바 있다. 식물의 경우도, 아직 연구가 부족하지만 식물도 무언가를 인지한다는 증거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고, 아직 인간들이 파악하지 못했을 뿐 식물도 식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지성이나 감정이 존재할 수도 있다.


결국, "개"를 특별취급해야 할 이유는 감정적 측면 이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 차원의 혐오라면(참고로 필자도 개고기를 혐오한다) 전혀 문제되지 않지만 사회적 문제로 끌고 오기에는 어불성설이다. 마치, 필자가 담배를 싫어한다는 감정적인 이유로 담배를 금지시키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개를 꼭 먹을 필요는 없다" 라는 주장도, 담배를 꼭 피울 이유는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이다.)


결국 개를 섭취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해야 할 논리적 이유는 없다. 단지 비난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위 기사의 사례와 같은 "비인간적 행위"일 뿐이다.(기사에서 몬순이를 잡어먹은 행위도 사실상 반려견과 마찬가지인 개를 잡아먹은 행위이기 때문에 명백히 비인간적이다.) 이는 단지 "기분나빠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논리적 이유가 존재하는데, 바로 "인간성의 상실"이란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 악영항을 미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생명 존중의 가치가 상실된 사회는, 결과적으로 인간 존중의 가치 또한 상실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잔인한 사육방식이나 도축과정을 목격하고 경악하거나 비난하는 이유는 단순히 "보기 싫어서"라는 감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인간성" 이라는 측면에서 비난하는 것이다. 잔인함을 즐기고, 생명의 고통을 방치하는 사회는 지극히 병든 사회이다. 인간과 동물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생명과 감정이 있는 생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따라서 생명 존중이 상실된 사회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치 또한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와 같은 기사에서 등장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공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다른 식용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만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로 인해 "개고기 섭취는 잘못이다" 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러한 글들을 보면, 이 부분을 교묘히 섞어서 호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그 근본이 "논리" 가 아닌 "감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논리가 결여된 감성적 주장에는 그 근본적 구조에 구멍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주장을 사회적 의제로 제기하고 합의를 도출하여 제도화하고 싶은 경우라면, 이러한 구멍 있는 주장은 위험하다. 이런 주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질 제도 또한 구멍투성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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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이 무엇이고 왜 병신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러한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개념을 들고 나오는 작자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개독교의 병신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아직도 인간 지성이 이딴 헛소리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오히려 이렇게 "창조과학" 따위가 생겨나는 사실 자체가 인간 지성이 그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즉, 창조과학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그러한 개념을 믿는 작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의 지성이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창조과학 따위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즉 그러한 개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지성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자. 과거에는 "과학" 따위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나 신의 말씀 따위를 절대적으로 숭상하고 있었고, 아무리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 실험 결과를 배척했다. 신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당연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것과 충돌하는 것이 당연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써 천동설과 지동설을 들 수 있다. 감히 신의 말씀과 충돌하는 관찰결과를 계속해서 주장할 경우 종교재판에 처해질 수도 있는 불경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렇기에 더욱 더 신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믿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발전을 거듭하고 인간의 지적 수준이 그에 맞춰서 점점 상승해 가면서, 사람들은 관찰과 실험을 통한 과학적 결과물의 상당 부분이 신의 말씀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점차 사람들은 신의 말씀의 절대적 지위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이렇게 맹목적인 미신의 늪에서 점차 빠져나오는 현상은 인간 지성의 발전을 가속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즉,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인간 지성의 발전-미신의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개독들이 단지 "신의 말씀이다!!!" 라고 외치는 것 만으로는 그들의 믿음을 관철시키기 힘든 경지에 이르고야 말았다. 과학과 인간 지성의 발전을 통해 사람들이 과학적 결과에 상충하는 대상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대해 점차 회의감을 품게 되면서, 그들의 개독사상을 유지하는 것에 점점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점점 심화되면서, 개독들은 점차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즉, 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과학적 결과물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물들을 어떻게 하면 신의 말씀과 융화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그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처음에는 과학을 억압했으나, 나중에는 과학과 종교는 별개의 사실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즉 과학은 엄연히 형이하학적 현실세계에서의 문제이고, 종교는 이를 넘어선 내세와 구원의 세계, 즉 믿음의 세계로서의 문제임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과 종교와의 상충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는 마치 과학은 사실판단만을 할 뿐 그 자체로써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와 비슷한데, 여기서 문제는 종교는 실제로는 가치판단의 영역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사실판단의 영역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주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이다. 즉, 종교는 그 자체의 세계관을 위해 가치판단 뿐만 아니라 사실판단 영역까지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영역은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던 것이 문제였다.


예수쟁이들도 전부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기존까지는 그저 과학을 배척하기만 하면 됐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바로 창조과학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창조과학의 병신성을 파악했기 때문인지, 혹은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다는 그 자체 모순적이고 스스로도 부끄럽다고 느낄 만한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창조과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예수쟁이들은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현재 성경에 존재하는 사실판단의 영역을 상당 부분 "비유"로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즉 6일만에 세계를 창조했다든가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든가 하는 부분들을 죄다 비유로 해석함으로써 과학과의 상충을 피한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는 심지어 진화론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과학의 발전에서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종교의 영역을 철저하게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한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엄연히 지들의 성경에 씌여 있는 내용을, 지들 좆대로 어떤 문장은 비유로 해석하고 어떤 문장은 의미 그대로 해석한다는 사실 자체가 웃긴 코미디에 불과하긴 하지만, 최소한 이들은 명백한 과학적 결과물에 대해 종교의 믿음 강조만으로는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이에 맞서 종교를 지킬 방법은 그 영역을 철저하게 정신적인 부분에 한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종교를 믿고 있는 지성인들도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과학자들도 종교를 믿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대부분 가치판단을 다루지 않는 과학만으로는 정신적 공허감을 해소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충족받기 위해 종교를 믿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세상에는 이들 같은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병신같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종교와 과학의 상충 문제를 두고,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합치기 위해 고민했다. 물론 과거에 그랬듯이 과학을 탄압하고 성경만이 옳다고 주장했다가는 대부분 코웃음을 칠 뿐이기 때문에, 결국 이들이 취한 행동은 바로 그 과학에 대가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기어들어가는 웃기는 방법이었다. 즉, 사실은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판단적인 부분이 실제로는 과학적 결과물과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이후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창조과학 따위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에 그것을 만들어내거나 그들을 따라서 이를 추종하는 인간들의 형편없는 지성에 주목하여, 인간 지성이 아직까지도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거나 혹은 이로 인해 인간 지성이 후퇴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해놓은, 창조과학의 발생 과정을 잘 살펴 보면, 오히려 이것은 인간 지성의 형편없는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 지성의 발전 과정 상에 존재하는, 인간 지성의 발전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갖는 지극히 명료한 상징성은 다음과 같다. 과거 암울한 시절에 과학을 배척했던 그 종교쟁이들이, 즉 과학으로 하여금 종교에 맞추도록 하기 위해 억압해 왔던 그들이, 이제는 과학에 대가리를 숙이고 들어가서 "사실은 우리 말이 과학느님의 말과 일치한다!!!" 라고, 종교를 과학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그 이후에 저들이 과학을 좆대로 해석하고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을 내세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창조과학도 과학이라면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같이 교육해야 한다는 병크마저 저지르고 마침내 FSM님을 이 세상에 강림시키는 사태를 초래한 것들 따위는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동안 대가리를 쳐 들고 과학적 결과물에 대해 빼애애액 거리면서 미신을 강요하려고 했던 바로 그들이, 이제 고개를 숙이고 어떻게 하면 과학의 나와바리에 엉덩이를 비빌 수 있을까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명백히 인간 지성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에 있어서의 사실판단적인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옳다고 주장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인간들의 보편적인 지성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이는 결국, 인간들이 점점 미신의 늪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창조과학이 온갖 병신소리를 늘어놓아서 주위에 폐를 끼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미 현세대 인류의 지적 수준은 창조과학의 병신성을 완전히 논파하고도 까마득하게 남을 정도이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는 작자들과 함께) 그들만의 리그에서 노는 것에 그치게 될 것이다. 창조과학의 등장은 인간 지성의 암울한 현 상태의 표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성의 발전과 승리의 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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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4.29 16:43

    비밀댓글입니다

며칠 전에 이러한 글을 썼는데 (http://weirdsoup.tistory.com/342), 도중에 깜박하고 한 가지 빼먹은 점이 있어서 약간 보충하기 위해 쓴다.

 

예전에 "5억년 버튼" 이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링크: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097&l=149552)

 

필자 개인적으로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비웃는 악마의 도구를 보는 듯한 섬뜩함을 느낄 수 있었던 수작인데, 저걸 본 많은 사람들이 과연 나라면 저걸 누를까 안 누를까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가지 의견들을 내놓곤 했었다.

 

그 중에서도 "누른다" 라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은, 아무리 5억년의 지옥 같은 시간이 있더라도 결국 기억에서 완전히 제거된다면(완전히 기억을 못한다면) 이는 "없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뜻에서였다. 즉, 이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남는 것은 100만엔 밖에 없게 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누르지 않는 것이 바보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 중 하나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나중에 기억을 못한다고 해도(사실 여기서는 차라리 기억하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이지만 일단 그 점은 넘어가고) 그 순간의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겠느냐는 점이다.

 

만약,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생성-소멸되는 것과 같이, 어느 특정한 기억이 그렇게 "완벽하게 없던 일로" 되는 것처럼 소거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사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일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필자가 위에 쓴 글에서 한 가지 간과한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저 글의 후반부를 보면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극복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이건 소설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되든 간에 작가 마음이다. 방인아 세계관에서 인어가 사라질 때 그 기억이 어떤 식으로 소멸되는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소멸 방식이 말 그대로 "무로 되돌리는 것"처럼(필자가 윗문단에 언급한 대로) 소멸되는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 될까?

 

우선 방인아 소설을 놓고 생각해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남기 때문에(즉 일련의 행동들이 시간축 상의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그 중간의 일부분을 자른다고 해도 나머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경우에는 그 시간대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딱 "인어"라는 특정인에 대한 기억만 사라질 뿐이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저 윗글에서 고찰한 내용이자, 현실로써 존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치매노인이라든가 어린시절 기억이라든가 기타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사례는 여기까지의 언급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만약, 시간축 상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형태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즉, 위의 "5억년 버튼"과 같은 경우라면 어떠할 것인가? 사실 이 부분은 필자가 애초에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 아니고 윗 글의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윗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 "기억=자아 or 존재의미?" 에 대한 부분을 다루려면 이 부분까지도 고려하는 것이 맞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다, 필자가 무슨 철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명학한 답을 내릴 수 없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도록 하겠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은데, 우리가 이러한 부분을 접할 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관찰자"로서의 입장과 "당사자"로서의 입장을 구분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관찰할 경우, 이는 마치 "없는 것" 과 같으므로 그 기억에서 쌓아올린 모든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과 같다. 그러나 당사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비록 그 당사자 자체도 그 기억이 마치 완전히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과 같게 된 건 마찬가지지만, 그 기억을 겪는 순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필자가 위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므로 모든 의의는 현재에 있기 때문에, 그 기억(즉 경험)을 실제로 겪는 그 순간을 고려해야만 한다.

 

때문에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를 볼 때, 그것을 완전히 없던 일과 같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위의 "5억년 버튼"의 경우, 필자라면 절대 누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저런 일이 실제로 닥칠 경우를 가정해 보자면, 당연히 먼저 의심을 해 봐야 하는 일이 상책인데, 관찰자의 입장에서(즉 누르기 전의 제3자의 입장에서) 살펴볼 경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가 없던 일로 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아무 일도 없이 그저 돈만 줄 뿐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왜 공짜로 돈을 주는 것인지,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닌지 우선 고민해봐야 할 것이고,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버튼을 누르기 전에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염두해 두어야 하는데, 우선 5억년 운운은 뻥이지만 뭔가 다른 함정이 있을 가능성, 그리고 실제로 5억년이 사실일 가능성이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 당연히 피해야 하는 일이고, 만약 후자의 일이 일어날 경우 그 과정을 거친 나 자신은 기억을 잃고 완전히 없던 일과 마찬가지가 된다고 해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 일을 겪을 그 순간의 고통을 생각하면 도저히 누를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예전에 혼자 공상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어느 한 찰나의 순간에 입자와 반입자가 동시에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전후의 질량차이는 없으므로 결국 이는 없던 일과 같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실제로 "없던 일"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리 찰나의 순간이라 할 지라도 실제로는 존재했었던 일이다.

 

이를 필자가 예전에 정신적으로 피폐한 생할을 보낼 때 한창 몰두했던 허무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자면, 인간의 삶이란 우주 전체로 보자면 지극히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고, 모든 인간은 억겁의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다가 찰나의 시간 동안 잠시 존재하고는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데,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결국 모든 것은 "무"와 같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필자가 심취했던 허무주의의 요지인데, 이는 마치 입자와 반입자의 생성-소멸과 흡사한 점이 있다. 즉 필자는 모든 인간의 삶이란 입자와 반입자가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것과 같으므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윗 문단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무리 "없던 것에 가깝다" 라고 해도 그것이 완전히 "없던 것"은 아니고, 따라서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 "없는 것과 같다" 라고 보는 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살펴봤을 때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이를 겪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모든 것은 "현재"에 존재했었던 것이 맞으므로 없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위의 "5억년 버튼"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로서 생겨나는 그 "기억"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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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talgall.net/56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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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변태가 성적인 목적을 갖고 여자화장실에 침입하면 성적목적공공장소침입죄로 처벌받는다

여자화장실은 남자가 없다는 것이 당연한 장소고, 또라이가 아닌 이상 똥오줌마렵다고 여자화장실 들어가는 놈은 없다.

화장실에 들어간 여자들은 그 누구라도 남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권리을 얻는 것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어떠한가?

남자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 누가 게이인지도 모르고

수많은 게이들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 중에 남자 변태들처럼 성적 목적을 갖고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는 게이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모르긴 몰라도 옆에서 오줌싸면서 니들 자지크기를 품평해본 게이놈들이 몇 명씩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대 성적목적 공공장소 침입죄로 처벌받지 않고 처벌할 수도 없다

누가 게이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입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 할 화장실에서조차 게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변태적인 음란한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화장실뿐만이 아니라, 탈의실이나 목욕탕 등도 마찬가지다

남자 변태들이 이러한 장소에 들락거리고 여자들을 음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곧바로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법의 철퇴를 맞겠지만

변태 게이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남성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자행할 수 있는 것이다.

비단 변태뿐만이 아니다. 정상인이라 할지라도 여자 탈의실이나 목욕탕에 가서 알몸을 목격하면 "뭔가"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남자들은 "모든" 게이로부터 저러한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같은 상황에서 여성이라면 심각한 성적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게이들의 존재로 인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남성들을 게이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정답은 한가지다. 게이들은 이성애자 남성들의 사적인 공간에 침입해서는 안된다.

누가 게이인지 알 수 있도록 인식물을 부착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화장실 등등도 따로 구비해서 남성들을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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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드립이다. 내가 맨날 쓰는 똥글이 그러하듯이, 진심 50%에 병맛드립 50%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해당 글의 댓글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또한 필자가 개인적으로 주변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즉 동성애자로 인한 잠재적인 성희롱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도 단 한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좀 의외였는데,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일반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란 본인의 성적 지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 때문인 듯 하다. 즉 남자가 남자인 내 몸을 쳐다보는 건 남자로써 그닥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는데 비해 여자가 쳐다보는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수치심이라는건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남자가 쳐다봤을 때 수치심을 느끼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이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비교하는 행위는 당연히 예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남자의 경우에 화장실에서 오줌을 싸는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게이일 가능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남자화장실에 존재하는 사람, 즉 다른 남자가 쳐다보든 그닥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런건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가(특히 청소 아줌마가 아니라 - 이 경우도 꽤 문제가 있는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어차피 이 점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매우 많으므로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 내 또래의 여성이) 남자화장실에 들어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오줌을 쌀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보다시피, 성희롱이라는 것는 것은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데, 게이들로 인해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거의 없기 때문에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 본인은 이러한 현상 자체에 좀 의문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본인이 군생활을 할 때 "성군기 위반"이라는 규정을 접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군대에서는 동성애 자체가 범죄행위이다. 동성애 인권 탄압인가 할 수 있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조치이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필자가 듣기로는 예전에는 육사 내에서 이성교재를 할 경우 징계조치를 받았다고 들은 적이 있다. 여튼 필자는 그러한 규정을 들으면서 게이 문제, 특히 게이 본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군대는 단체생활이다. 잠도 여러 명이서 같이 자고,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옷도 갈아입고 다 한다. 목욕도 단체로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게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들의 심경은 어떠할까? 필자는 군생활을 하면서 종종 이 점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한편으로 그러다 보니, 필자는 저러한 상황에서 언제든지 주변에 게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화장실에서 오줌을 싸는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게이일 수 있고, 군생활이나 예비군 동원훈련을 갔는데 옆에서 자는 사람이 게이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게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는데, 이로 인해 내린 결론은, 게이들이 성적 자극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필자는 좀 민감한 편이라서, 오줌을 싸는데 누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심히 불쾌하고 오줌을 제대로 싸지 못한다. (참고로 말하지만 자지사이즈에 대한 컴플렉스 같은 건 없다. 단지 기분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잘 안 하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로 인해 성적 수치심까지는 느끼지 않지만, 만약 상대방이 게이였다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는 상대가 게이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관계가 일반적인 이성 관계라면, 상대방이 성적인 목적을 갖고 나를 쳐다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무조건 성적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은 함부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 수 없다. 예컨대 남자 화장실에 여자가 침입하거나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게이들은, 만에 하나 성적인 목적을 갖고 본인을 쳐다본다고 해도 본인이 알 수가 없어서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형평성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필자는 게이들 모두가 변태이고 성적인 목적으로 중무장한 또라이들이라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연히 이성애자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모두 잠재적인 성범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는 행위는 어떠한 목적에서든 금지되어 있고 실수로 들어가더라도 성폭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따라서 지극히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동성애자들 또한 마찬가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변태 동성애자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이는 마치 변태 남성들이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여자화장실에 들락거리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데,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피해 여성들은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과연 피해자가 피해를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그러한 상태가 정상적이고 문제가 없는 상태인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참고로 말하자면 최근에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조항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물론 피해를 입었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고소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사법당국이 피해자의 의사를 넘어서서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도 있다.

 

누가 몰카를 찍었는데, 피해자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처벌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성적 수치심을 느낄 것이고, 만에 하나 피해자가 변태라서 노출증이 있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건전한 일반인이라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맞고 그러한 사람들 또한 피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처벌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자가 남자를 쳐다본다고 해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변태 게이가 성적인 목적을 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본 필자는 이러한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소수의 변태를 제외한다면, 누가 자신을 성적인 목적으로 쳐다보는 행위에 대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소수의 변태야 당연히 고려할 가치가 없고, 또한 실제로 성적인 목적이 있든 없든 간에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다시 말하자면,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당장 설문조사라도 실시해 보자. 호모포비아든 아니든, 게이가 당신을 성적인 목적을 갖고 변태적인 시선으로 쳐다본다면 불쾌감과 성적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아니면 당당하게 쳐다보라고 권유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대부분이 불쾌감을 표할 것이다. 사실 게이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 또한 여기에서 연유하는데, 많은 이성애자 남자들은 다른 남자가 자신을 성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것 자체를 역겨워하기 때문이다. 게이들이 모든 남자들을 끈적한 시선으로 핥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능성" 자체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그러한 현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소수의 변태 게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쳐다본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다면, 당연히 심한 불쾌감과 수치심을 유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문제는 여기에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서, 마땅한 해결책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가 메갤에 싸지른 위와 같은 황당한 드립이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를 올바르게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면, 책임없이 문제제기만 던지고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필자는 여태껏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우선, 누가 게이인지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표 부착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드립이다. 개인의 성적 지향 따위를 공표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인권 침해이다. 화장실을 남자 여자용으로 따로 만들고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성별이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나 보일 뿐더러 이를 남에게 인지시키는 것 자체가 현재 사회 합의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개인의 성적 지향을 남에게 인지시키는 행위가 매우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인지되는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먼 미래에서는 그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게이들은 변태 게이에 의한 성범죄의 대상이 되어도 되는가? 당연히 아니다. 변태 게이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은 이성애자들 뿐만 아니라 같은 게이도 당연히 포함되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이성애자들보다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데 게이용 화장실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게이들은 변태 게이들에게 노출당해도 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

 

따라서 게이용 화장실을 따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그냥 개드립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 것인가? 전혀 해결책이 없다.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면, 공공화장실의 기본 전제, 즉 여러 명이 동시에 이용하는 공간이라는 점 자체를 바꾸는 것밖에 없다. 즉 철저하게 칸막이 등으로 분류된 공간을 마련해서, 그 공간 내에는 하나당 한 명밖에 이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각한 공간 낭비에 돈낭비, 시간 낭비를 유발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목욕탕 같은 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게이들로 하여금 행정당국에 신고하도록 하고 목욕탕과 같은 공간에 출입할 수 없게 막아야 하는가? 당연히 차별이고 인권 침해다. 물론 호모포비아들은 적극 찬성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불특정 다수의 선량한 남성들을 변태 게이들의 성범죄 대상으로 무방비하게 노출시키는 것이 옳은 행위인가? 본 필자가 계속 문제제기한 바 대로, 본 필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가 심각하다. 분명히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혹시 이 글을 읽을 (잉여력이 충만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대부분 필자의 고민에 대해 존나 쓸데없는 일이라고 일갈할 것이다. 그러나 본 필자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정작 자기 자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품평하면 발끈할 사람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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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메갤러 2015.07.03 18:14 신고

    좀 다른 얘긴데 성적 정체성 문제는 어떻게 생각함? 예컨대 수술은 안 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트랜스젠더인 남자가 있다면 걔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남모를 성적 모멸감으로 고통 받는 거 아닌가?

    • BlogIcon WeirdSoup 2015.07.04 01:04 신고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해봐서 솔직히 잘 모르겠음. 그런데 본 글의 주제와는 다른 이야기인듯 (물론 글머리에 다른 이야기라고 써 놨긴 하네)

  2. BlogIcon 메갤러 2015.07.03 18:17 신고

    어쨌든 님이 전개한 논지는 여자들한테까지 적용해보면 더 답답하고 답이 없는 듯. 그냥 냅둬여... 최소한 같은 성별끼리 쓰면 힘 차이가 덜 나서 물리적인 성폭력은 그나마 억제되겠지

  3. gg 2015.10.11 18:53 신고

    게이색히들은 진짜 몰살해야함..

(혹시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이 있다면, 졸필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이 글은 지하철 이동 중에 스마트폰으로, 검토과정 없이 작성된 글이다. 가볍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어떤 음악이 지루하거나 구리다고 느껴진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실제로 그 음악이 별 볼일 없는 경우, 다른 하나는 그 음악을 듣는 자기 자신의 안목이 형편없는 경우(즉 이해를 못하는 경우)이다.


보통은 후자일 확률이 훨씬 크기 마련이다. 음악의 세계는 방대하고, 대다수의 음악 스타일을 마스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세부장르로 제한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가능할 수는 있으나, 정말 웬만한 고수가 아닌 이상 후자의 가능성을 좀 더 높게 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다면, 비록 자기가 듣기에 지루하고 구린 음악이라도, 남들의 추천을 따라서 일단 귀에 우겨넣어야 하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특히 폭서(다음카페 circle of the tyrants)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그것이 별로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음악에는, 자기에게 "맞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음악의 절대적 가치를 전제하고 이를 추구하는 일부 집단과는 잘 맞지 않는 가치관이지만, 본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기 자신의 지적 능력이 딸리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사실상 예술적으로 깊이가 깊은 복잡하고 심오한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고, 그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왜 그러한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사실 이유가 없고,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하다.


음악 감상 행위 자체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또한, 질 높은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리스너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음악 감상행위 자체에 불필요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행위를 강요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뿐더러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수준이 딸리는 사람이 굳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감동도 못 느끼는 복잡한 음악을 굳이 억지로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사람 수준에 맞는 쉽고 재미있는 대중음악을 들으면 충분하다.


다음으로, 지적 수준이 높은데도 음악에 대한 충분한 이해(내공이라고들 하는데)가 부족하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에도 억지로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우선 그 "지적 수준"이나 "내공"이라는 것이 일률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고, 따라서 사람마다 수용 가능한 음악도 천차만별이다. 추천해준 사람은 좋다고 추천했으나 실제로는 더 높은 심미안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저 그런 음악일 수도 있고, 혹은 자기 자신의 수용 가능한 영역이 딱 그 아래일 수도 있다.


위의 문단에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건, 다른 사람들의 추천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마다 수용 가능한 음악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가 수용 가능한 한도에서 최고의 음악들을 찾아듣는 것이 낫다.


그리고, 실제로는 충분히 좋은데도 지금 당장은 준비가 부족하여 수용하지 못했던 음악들의 경우, 다른 음악들을 쭉 듣다 보면 어느새 수용 가능하게 변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때 들으면 된다. 필자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때, 억지로 음악을 주입한다고 해서 갑자기 그 음악이 좋아지게 되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들어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남의 추천과 비추천만을 믿은 나머지 어떤 음악은 듣지도 않고 어떤 음악은 억지로 듣는 행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음악이란, 궁극적으로, 듣기 위해 존재한다. 즉, 모든 음악은 자기 자신이 직접 "들어 보고" 판단해야 한다.


남들이 추천 혹은 비추천했다고 해서 어떤 음악에 대해 일종의 낙인을 찍고, 그에 따라 청취행위를 하는 것은 때로는 (음감생활을 함에 있어서) 위험할 수 있다. 남들이 추천했는데 별로라면, 그냥 자기에게 맞는 다른 음악을 찾아듣는 것이 좋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지적 수준 등으로 인해 수용 가능한 음악의 범위가 딱 그 아래까지라면 거기까지만 들으면 되고, 단지 청취 학습이 부족했을 뿐인 경우라면 다른 음악을 듣다가 언젠가 그 음악이 이해될 때 들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음악을 듣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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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WeirdSoup 2015.03.28 18:16 신고

    다시 읽어보니 이 글은 완전히 개판이다. 문제점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새로 써야 할 것 같다.

  2. BlogIcon 등푸른생선 2015.04.09 16:09 신고

    요새 잘 살고있냐?

  3. ㅇㅇㅇ 2017.02.17 01:44 신고

    신나게 노라조 디스하신 분이 쓸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BlogIcon WeirdSoup 2017.02.17 04:51 신고

      대체 이 글 어디에 "모든 음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자" 혹은 "남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까지 말자" 등의 주장이 함의되어 있다는 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님의 놀라운 이해력에 경악을 토하고 갑니다.

      (이 글의 주장은 음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인데,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면 당연히 남들 다 좋다고 하는 것도 실제로 들어봐서 아닌거 같다 싶으면 가차없이 디스할 수 있어야 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요? 물론 아무 이유도 없이 싫다고 하는건 병신이지만, 이미 이유도 다 밝혔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리뷰"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곤 한다. 영어로 Review 라고 써 놓으니까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는데, Review라는 단어의 뜻은 "평론"이다. 그리고 평론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평론가"라고 한다. 즉, 원래 리뷰라는 것은 평론가들이 쓰는 평론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전문 평론가들이 평론을 쓰지만, 전문적인 평론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전문성을 갖춘 아마추어 평론가들도 평론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개개인이 손쉽게 자신의 평론을 인터넷 공간에 투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아마추어 평론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마추어이든 전문가이든 간에, "평론"이라 함은 어떠한 대상을 평가하여 논하는 행위이고, 이러한 행위에는 그에 맞는 최소한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상식, 교양 등을 갖추고 이를 배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는 애초에 "평론"이라는 것이 그러하기 때문이며, 이를 갖추지 않은 평론이라는 것은 독자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전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선무당이 사람 잡듯이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누군가 "리뷰를 쓴다"라고 한다면, 이는 한국말로 다시 말하자면 "그 음악에 대한 평론을 작성한다" 라는 말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 음악을 평가하여 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어야 함이 맞다. 이 때 어느 정도가 "최소한"인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최소한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제대로 된 논평을 작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리뷰"랍시고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 글들을 작성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은 엄밀히 말해 "리뷰"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이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악 중에서도 특히 메탈 관련 리뷰들 중에 위와 같은 리뷰들은 "메탈X덤" 이라는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전문적인 지식과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리뷰를 작성하지 말아야 하는가? 당연하다. 좀 다른 대상을 예로 들어 보자면, "논문"이라는 것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그 학문에 대한 최소한의 전문 지식을 갖춰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작성한 논문은 "논문"이 아니다. 왜냐 하면, 논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하기(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이 무언가를 연구해서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리뷰" 즉 평론이라는 것의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그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글을 쓸 때 함부로 "~ 리뷰" 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 글을 작성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감상문"을 쓰기를 권한다. 그러한 사람이 평론을 쓰려고 해 봤자 그것은 제대로 된 평론이 아닐 것이고, 반면에 감상문은 어떠한 작품을 감상하고 느낀 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성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위와 같은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최소한 그러한 자격을 갖추기 전에는 "리뷰"라는 것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음악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앞으로 내가 쓰는 음악 글들은 그것이 얼핏 리뷰처럼 보일 지라도, 혹은 "리뷰"를 쓰는 란(예: 메탈X덤의 리뷰 항목)에 올라갈 지라도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리뷰가 아니라 감상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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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주제를 바탕으로 무슨 칸트까지 들먹이며 긴 글을 쓰다가, 존나 쓸데없는 짓 같아서 그냥 간단하게 내 생각만 쓰겠다.

 

나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은 인과성의 법칙 하에 존재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을 관통하는 공통된 법칙이라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개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생각 하에, 나는 인과성(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법칙이라고 판단했다.

 

모든 생성과 소멸, 그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 간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 일단 우리가 관찰 가능한 거시적 우주 세계에서는 그러하다. 미시적으로 따져 본다면 본인이 관련 지식이 있는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본인의 믿음을 이야기하자면, 경험 세계에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다면(즉 원인과 결과로써 설명되는 현상들이 존재하는 "결과"가 발생하였다면) 그것의 "원인"이 그러한 결과를 나타내도록 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에서 그 "원인"이란 당연히 미시 세계이고, 따라서 미시세계 또한 이러한 인과적 관계 하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암튼 이렇게 만물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존재한다면, 인간의 사고 또한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이 말은 즉,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인과관계 하에 놓여 있는 물리적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성은 당연히 물리적 현상이다. 과거에는 이것이 마치 신성하다거나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과 같이 여겨지고, 인간의 이성이 무슨 절대적 가치인 양 판단되기도 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적으로 살펴보자면, 이성이란 결국 뇌의 복잡하고 방대한 판단작용의 결과이고, 이는 뉴런과 뉴런 간의 전기/화학적 신호전달을 통한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이는 DNA라는 유전인자를 통해 발현된 단백질이라는 화학 물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하자면, 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내려오는 인간 중심주의 사상이 매우 마음에 안 든다. 인간 또한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단백질 덩어리이고, 단지 대뇌피질이 좀 더 발달하여 고도의 사고능력을 갖춘 덕분에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존엄성 또한 인간이 인간 스스로 그런 개념을 만들어서 내린 것이지, 결코 외부에서 부여된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동식물을 포함한 생물들은 근본적으로 무생물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사고 또는 이성이나 의지 등이, 우리가 관찰 가능한 외부세계의 물리적 실체와 마찬가지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개념이라면, 우리들의 모든 의지는 이러한 인과적 관계 하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한다는 "결과"에는 그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원인이 없다면 결과 또한 없을 것이다.

 

자유 의지란, 어떠한 외부세계에서의 간섭이나 강제 따위가 없는, 순수하게 자발적인 원인에 기한 의지여야 할 것이다. (칸트의 자유/자율 등의 개념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불가능한 말이다. 외부 자극이 없다면(=원인이 없다면) 생각(=결과)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생각"("의지"의 바탕이 되는 인간의 사고)의 원인이 반드시 외부에서 올 수밖에 없느냐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인간 뇌는(=모든 사고활동이 일어나는 기관)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명유지를 위해 존재한다. "뇌" 자체가 어떤 가치를 갖고 그 자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관을 잘 유지하고 작동시키기 위해서 신체에서는 이러한 뇌에 각종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다발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신경들을 통해 뇌에 외부 자극들이 유입되고, 그러한 자극에 의해 전기적(뉴런 내부)/화학적(시냅스 간 연결) 작용을 통해 대뇌 피질이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우리가 말하는 "의지"니 "사고"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컴퓨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컴퓨터를 만들어놓고 어떠한 외부 자극도 가하지 않는다면 컴퓨터 자체로서는 어떠한 기능(=인간 뇌가 사고를 하는 것과 같은)을 할 수 없다. 전원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입력해야 비로소 그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순수한 뇌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어떠한 외부 자극에서 단절시켜 놓는다면(물론 그 이전에 뇌가 썩겠지만 그런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그 뇌 속에서 과연 일말의 사고 활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전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사고 활동이란 철저하게 생물학적인 개념이다.

 

여튼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외부로부터의 원인에 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우리의 사고 또한 외부의 인과관계 하에 놓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좀 더 생각해 보자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나아가서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원인이 따른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역으로 생각한다면 어떠한 원인으로써 어떠한 행동 등의 결과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어떠한 행동을 하며 그 결과로 어떠한 현상을 발생시키던 간에, 그것은 그것의 원인이 된 어떤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1에 1을 더하면 2가 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앞선 문단을 통해 원인으로써 결과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원인으로써 결과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를 이 사회 전체, 나아가서 이 세계 전체로 넓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 인간의 생성-성장-소멸, 그러한 인간 집단의 생성-소멸, 그 집단들의 사회 현상들의 생성 소멸과 나아가서 생태계의 각종 변화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써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각종 외부적 자극들이 원인이 되어 내 대뇌 피질에서 이러한 사고를 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대뇌 피질이 신체에 명령을 내려 글을 작성하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 원인들은 앞선 현상들에 의해 발생한 결과들이고,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수많은 관계들 간의 인과성에 의한 상호작용에 의해 내가 오늘 일어나서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이 글을 쓰고 심지어 qwerty 키를 누르고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등의 일체의 모든 결과들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이대로 해석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개별 인간들의 뇌에서 매 순간순간 번쩍이는 사소한 생각들부터 각종 행동들과 그 행동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수한 결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해져 있다는 말이 된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예정되어 있고, 그 원인들은 각각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리저리 얽혀서 원인이 원인을 낳는 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건(=결과)들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결국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이미 빅뱅의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 최초의 "원인"으로써 결국 모든 "결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근데 이 점에서 약간 회의감이 든다. 과연 모든 사건들은 일말의 "우연성"과 "확률"의 여지가 없이 완벽하게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다소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써 보기로 한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자유 의지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의지 또한 생물학적으로 볼 때 대뇌피질의 연산작용이고, 이는 물리적 현상의 일부로서 다른 물리적 객체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인과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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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에 대한 가장 빈번하고 멍청한 공격이 바로 "도덕성"에 대한 공격일 것이다. 그들의 논지는 이러하다. 모름지기 도덕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이 바로 종교이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그러한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도덕성의 근본마저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도덕이라는 것은 본래 강제성을 띄고 있는 것으로, 어떠한 기준이 없다면 누구도 그것을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은 도덕을 약화시키고 무질서를 옹호한다는 것이다.

 

종교인들의 이러한 멍청한 열등의식과 인간성에 대한 패배의식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지만, 뜻밖에도 우리 사회의 보편된 통념에는 "하늘" 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어서, "천벌"을 운운하는 광경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비록 개독교따위 신자가 아니더라도,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따위의 말을 통해 도덕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도덕 법칙에 있어 어떤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 절대자가 무너지는 순간 도덕 법칙도 끝장나는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을 협소하게 정의내림으로써 발생하는 것에 불과하다. 분명 도덕에는 저러한 종교적 도덕도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로 인해 확립된 도덕이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도덕이 파괴되고 말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진화심리학적 관점을 싸그리 무시한 개소리에 불과하다. 가장 기본적인 도덕 법칙은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을 정의내림에 있어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도덕이란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사회를 형성하면서 만들어진 사회 규범으로, 이것이 발전하면 (꼭 "발전"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여튼 "법적 확신"을 갖게 되고 그것이 규범하되면) "법"이 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일종의 관습적 규범이 된다. 이러한 규범들은 구성 사회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예컨대 어느 사회는 사촌간 결혼이 부도덕한 일이지만 어느 사회에서는 권장할 만한 일이고, 어디에서는 매춘이 불법이지만 어디에서는 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 스스로에게 내재된 기본 도덕법칙들이다. 이는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층위의 것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양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예컨대 살인을 꺼리는 마음, 어려운 자들을 도우려는 마음, 공명정대함을 추구하려는 마음 등이 있다. (한가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양심의 가책이란 사회 규범을 어겼을 때에도 발생하는 후천적 학습으로 형성되는 것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가책"만 가지고는 이를 논할 수 없고, 가장 기본적으로 인간 DNA에 내재되어 있는 행동 특성만을 논해야 한다.)

 

인간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공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어떠한 행동규범을 그 습성으로 내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기본 도덕 법칙이다.(인간의 사회성이 진화 과정에서 내장되었다는 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자세한건 검색) 이러한 기본 도덕법칙은, 사실상 인간 "본성"이라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질적 차이란, 여타한 형이상학적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전자"에 있을 뿐이라는 철저한 합리적 실증주의의 입장에 기반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은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종교 따위 없다고 해도, 기본적인 도덕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로서 존재할 것이다. 지금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도덕에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기준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도덕의 기준점은 사회 관습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그 근본은 다름 아닌 인간의 본성이다.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이 도덕 법칙을 관장하는 주체자라면, 사회마다 도덕이 전부 다른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전지 전능한 신이 어째서 도덕 법칙이 차이나는 현상이 발생하도록 방치하였는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결국 그 신이 정한 기준점 외의 모든 도덕은 전부 거짓된 것이고, 결국 우리 사회의 수많은 법과 관습, 규칙들 중에서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도덕 법칙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런데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사람마다 주장하는게 전부 다르고, 같은 기독교라도 교리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참 다중인격이거나 일처리를 엉터리로 하는 신이 틀림없다.

 

게다가 여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사회 규범으로서의 도덕은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같이 변화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죽어 있는, 고정된 법칙이 아니라 사회와 같이 살아서 변화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만든 도덕법칙은 인간따위가 변화시키는 사회와는 무관하게 항상 범우주적으로 불변하는 진리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인간 사회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사회의 변화에도 무관한, 인간 기준으로 거의 불변인 것처럼 보이는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인간 본성에 내장된 도덕 원칙이다.(물론 이것도 진화 과정에서 변화하게 마련이지만, 진화 과정은 인간이 목격하고 관찰하기 힘들 정도로 길기 때문에 인간 기준에서는 사실상 불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무신론자들이 오로지 그 삶의 기본 규범으로 따르는 것은, 바로 저 인간 본연의 도덕 원칙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신론자들과는 달리, 위에서부터 강제로 (소위 "천국과 지옥의 협박" 따위를 통해) 주입되고, 절대자가 저 위에서 심판의 철퇴를 들고 윽박지르며 억지로 따르게 만드는 그 작위적이고 소극적이며 패배주의적인 엉터리 도덕원칙과는 달리, 바로 인간 본연의 본성에 근거한 자연스럽고 자주적이며 인본주의적인 도덕 원칙 말이다. 과연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가? 절대자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 지키는 도덕과, 스스로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따라 스스로 기준을 정하고 맞춰 행하는 도덕, 어느것이 더 도덕적인가?

 

이를 통해 살펴보면, 오히려 도덕으로 공격받아야 할 것은 종교이다. 그 존재 여부마저 불확실하고 전지전능하다고는 믿겨지기 힘들 정도로 중구난방이며 줏대 없는 절대자가 천국과 지옥의 협박을 통해 강제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하는 도덕 기준을 내세우는 작위적 행태를 일삼는 바로 그 종교 말이다. 그들에게는 절대자나 천국지옥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 따위를 지켜야 할 필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허황된 개념인가?

 

이로서 알 수 있는 사실이란, 종교가 인간 본성과 지성을 억압하며 인간을 수동적이고 패배적인 존재로 이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로 거듭나는, 그리하여 패배주의적이 아니라 당당하게 인간의 가치를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종교로부터의 해방에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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