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들/깊은 생각

(14. 12. 29. 제목이 다소 부적절한 듯 하여 수정함.)

 

우선, 본인은 결과적 평등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도 아닐 뿐더라, 지극히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보더라도 결과적 평등이란 오히려 능력 있는,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이란 절차적 평등이 되어야 하며, 절차적 평등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되었든 간에 그것은 공평하며 정의로운 것이다.

 

이러한 절차적 평등에는 당연한 전제 조건이 있는데, 기회 균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모두에게 있어서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졌을 때, 비로소 절차적 공정함은 그 의의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몇몇 여성운동가들의 행태를 생각해 보자. 상당히 많은 인간들이, 결과적 평등주의를 외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여성 할당제"와 같은 황당한 제도로 나타난다. 남성에 대한 명백한 역차별인 이러한 제도는, "결과적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양성평등"이라는 미명 하에 옹호된다.

 

아마 이러한 사례 중에서 가장 기가 막힌 사례가 "여성 전용 주차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들도 이것이 너무나도 어이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원칙적으로 남성이 여성 칸에 주차하더라도 딱히 법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주차를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희한한 편견과, 그로 인해 "결과적 평등"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로 인해 생겨난 희대의 코메디일 것이다.

 

이러한 결과적 평등주의가 조금만 곱씹어 생각해 보면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알 수 있다. 노력을 90을 한 여성과 100을 한 남성이 있다. 그런데, 예컨대 10명을 채용하는데 이미 남성이 6명이나 합격한 상태이다. 공정하고 정당한 절차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연히 남성을 뽑는게 원칙이고 또 그래야만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결과적 평등주의자들은 양성평등을 외치며 "성비"를 맞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당한가?

 

나는 이러한 행태가 만연한 판국을, "피해의식"과 "보상심리", 그에 따른 "무임승차" 의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존의 사회적 약자였던 위치를 무기로 사용하여, 마치 평소 돈을 펑펑 쓰며 놀고먹은 덕분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사람이 복지금 타먹듯이 부당한 혜택을 타먹고자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결과적 평등주의가 아닌 절차적 평등주의라면 어떨까? 사실 이 글은 바로 이 점을 위해서 쓰는 글이다. 어떤 경우에는 절차적 평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결과적 평등"에 가깝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기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절차적 평등이란 공정한 절차가 온전히 지켜졌을 때에 성립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바로 "기회 균등"의 원칙이 지켜져야만 한다. 이 때, "기회 균등"이라는 것을 조금만 넓게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적 약자로써의 구제수단인 각종 복지 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성"을 놓고 따져 보면 어떨까? 즉, "성별"로써 생겨나게 되는 선천적이고 당연한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남성과 여성은 기본적으로 신체 구조가 다르다. 성 염색체의 발현과, 그로 인한 성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신체적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여성은 남성에 비해 남성호르몬이 현저하게 낮기 때문에 근육발달이 평균적으로 떨어지고, 그에 따라 기본적인 완력 차이가 심하게 날 확률이 높다. 또 다른 예로는, 여성은 기본적으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차후 임신을 하게 되는데, 임산부는 임산부가 아닌 사람보다 몸이 불편하고 여러가지 제약을 받게 된다.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여성과 남성을 절차적으로 "똑같이" 대하는 것이 온당한가? 즉, 위와 같은 선천적인 신체조건의 차이 자체가, 이미 "기회균등"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단언하겠다. 이는 기회균등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절차적으로 "똑같이" 대접받아야 한다.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임신 중인 여성을 일반 남성과 똑같이 대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임산부는 당연히 장애인 등 노약자에 준하는 보호를 해야 마땅하다. 여기서 말하는건 임신중인 여성이 아니라,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조건의 차이는,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하다거나 무엇이 더 "좋고"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것일 뿐, 어느 한쪽이 더 좋은 것이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보자. 장애인은 종류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일단 기본적으로 비장애인보다 불리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것에 대해 이의를 가질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즉, 장애 상태는 비 장애 상태보다 어떤 면으로든 반드시 "불리한" 상태이며, 동등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 둘을 같은 출발선상에서 출발시킨다면 명백히 "기회 균등"의 원칙의 위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은 그에 합당한 보완절차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의 경우와 달리,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그렇지 않다. 여성이라는 것 자체는 결코 어떠한 장애가 아니며, 비정상이나 열등한 상태가 아니고, 그저 남성의 신체조건과 "다를" 뿐인 상태에 불과하다. "동등"한 상태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상은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논리로, 예컨대 완력이 중요한 군인과 같은 직업을 채용할 때, 남성과 여성 둘 다 똑같은 조건을 사용해야 하는가? 예컨대 체력 검사를 한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감히, 현재의 사회 제도나 인식과는 달리, "그렇다" 라고 답하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취급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이미 "절차적 평등주의" 가 아니라, "결과적 평등주의"로 치닫게 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어떤 사람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사실 따위는 결코 장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열등한 상태가 아닌데,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차별이며, 또한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크게 착각하는 점이 있다. 양성평등의 프레임을, 남성/여성 이분법적 사고관념으로 국한시키는 바람에, 인간 개개인의 존재(객체)를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좁은 관념으로 우겨넣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인간은, 결코 그러한 성별 따위로 정의내려지고 엮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그가 "남성이라서 어떻다", 혹은 "여성이라서 어떻다" 라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일반화의 오류다. "남성은 힘이 세다"? "여성은 약하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대표적인 성차별적 스테레오타입이다. 그런데, 소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맨날 주장하는 바로 그 "성차별적 고정관념"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에 근거한 정책 주장을 펴고 있다. 모순이다.

 

인간은 성별 따위로 단순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조건이 열악한(여기서 말하는 것은 체력이나 체격 등을 의미) 사람이 있고,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남성보다 강인한 사람은 얼마든지 넘쳐난다. 단지, 전체적으로 봤을때 성 호르몬 등으로 인해 "대체적으로" 남성들은 여성보다 힘이 센 사람들이 많더라 정도의 사실만 존재한다. 결코 개개인 객체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획일적으로 어떠한 기준을 적용하여 모든 인간을 그 곳에 우겨넣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고, 절차적 평등의 위반이다. 군대를 예로 들면, 평균적인 여성보다 열악한 남성은 그 자체로 차별을 받고 있고, 평균 남성보다 강인한 여성은 부당한 혜택을 누림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역차별이 되고 있다. 인간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성별 따위로 획일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 없이 똑같은 절차적 평등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는 어떤 경향성이 존재한다. 예컨대 남성은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힘이 세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직업군에 있어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똑같은 절차를 적용했을 때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정당한가?

 

여태까지 이야기한 주제를 보면 알겠지만, 난 당연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직업에서 일할 사람은, 그 직업에 "적합한" 사람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떤 일은 그 일에 대한 적격자가 해야 한다."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 그 위치에서 일하면서, 그 사람보다 더 적합한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부당하다. 예컨대 극도로 단순화시켜서, 군인이라는 직업에 있어서 적격자가 팔굽혀펴기 2분에 72개 이상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사람이 그 직업에 종사하면서 정당한 보상을 얻어야 한다.

 

앞서 누차 설명했듯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그것과도 같이 "기회균등의 보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같은 "여성"이라도 인간은 누구나 다르고, 같은 "남성"이라도 누구나 다르기 때문에, 누구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위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누구는 여성임에도 위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와 같은 사람은 탈락하면 되고, 후자와 같은 사람은 합격하면 된다. 그 자격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이 그러한 자격을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던 율피아누스의 주장에 합당한 "정의로운 상태"이다.

 

누구든지 그 자격과 능력에 걸맞는 위치가 있고, 그러한 위치는 결코 성별 따위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성별로 인해 자격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에 올라가거나 그렇지 못하는 것은 결코 절차적 평등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에 의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따른 기회균등의 원칙의 잘못된 적용이, 위에서 언급한 절차적 평등이 결과적 평등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어떠한 직업이 평균적으로 남성에게 유리한 기준을 요구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에 합당한 사람이 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정당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어느 특정 직업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올라가지 못할 따름이다. 단지 해당 직업의 성비가 남성 또는 여성이 많다고 해서, 굳이 그러한 성비를 맞춰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직업마다 성격이 천차만별이고, 요구하는 능력 또한 다르다. 어느 직업은 평균적으로 남성이 더 유리하고, 어느 직업은 반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비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부당하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사족: 위와 같은 사례에서 장애인의 경우는 어떨까? 이미 위에서 언급한대로 장애인은 기회균등의 원리에 따라 보상을 해 줘야 하나, 해당 위치가 장애인이 일하기에 "객관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즉, 어떠한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방수나 군인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기본적인 "일"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 그러한 일을 맏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장애 여부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사무직 같은 경우 장애인은 채용 보호를 받고 있으며, 또한 장애인들은 국가로부터 복지 혜택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른 보상일 것이다. 이러한 보상이 필요한 경우는 주지하다시피 여성/남성 등의 문제와는 달리, 장애인은 이미 그 장애의 상태 자체가 정상인에 비해 부당하게 뒤쳐질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결과적 평등주의를 외치는 많은 여성운동가들의 주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절차적 평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선 첫번째로, 편견에 있다. 예컨대 남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군의 경우, 여성 지원자가 올 경우 면접관들이 편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당신은 여성인데 이 일을 잘 할 수 있는가?"와 같이, 상대방이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편견에 찬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물론 비단 일자리에만 이런 편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당장 운전행위만 보더라도 이러한 편견은 널리고 널렸다. 위에서 언급한 여성 주차장 자체가 이러한 편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사실 이는 이해할 수 있고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온전한 절차적 평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공정한 절차가 수반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러한 편견은 불식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성별의 차이는 단지 "다른 것"일뿐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라고 해서 특별한 혜택을 주어서도 안 되고, 특별히 차별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일련의 행위 자체가 사회에 편견을 낳는 행위일 뿐이다.

 

(사족: 본인은 병역의무를 오로지 남성만이 부담하는 제도 자체가 이미 사회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성차별적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여성운동가들은 이러한 점을 전혀 지적하지 않고 있다. 기이한 현상이다. 본인 추측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피해의식으로 인한 무임승차 의식에 의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 번째로, 제도적 문제점이 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남녀간의 단순한 생리적 차이는 다른 것일 뿐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해야 하며 여기에 어떠한 부당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시회는 아직까지도 여성의 생리적 차이에 대한 충분한 보호를 해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여성들에게는 출산 자체가 이미 사회적 경력으로서의 종말을 뜻한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경우이다. 임신과 출산이란 단지 남녀 간의 생리적 차이에서 기반하는 것일 뿐으로, 여성이 출산하는 것이 열등해서 그렇고 남성은 우월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부당한 차별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추가: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서 첨언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리적 차이"란 위에서 언급한 남성이 평균적으로 힘이 세다던지 하는 문제와는 다른 개념으로, 남녀간의 성 염색체적 차이로 생겨나는 성 기능에 관련된, 남녀를 구분짓는 필연적 차이를 의미한다.)

 

이것 말고도 육아 문제라던지 생리휴가라던지 기타 여러 문제점들이 있는데, 생리휴가 같은 경우는 논란이 많으므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여하튼간에 이러한 문제점들은 상기 언급한 "편견"과 같이, 우리 사회의 부당한 유교적-가부장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미 블로그에 누차 언급했다시피 본인은 유교/가부장제 혐오주의자이다. 그러한 유교가 현재 여성들의 정당한 사회진출과 자아실현을 가로막고 있다.(서양의 경우에는 아마 기독교가 그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불충분한 사회적 제도와 각종 편견으로 인해, 절차적 평등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결과적 평등주의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을 또 다른 잘못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며, 여성운동의 본질을 부당하게 폄훼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많은 남성들이 이러한 결과적 평등주의를 양성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내의 성대결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역차별을 막기 위해 기존의 잘못된 차별마저 정당화시키며 여성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이룰 수 없다.

 

유교적-가부장적 인습을 철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편견을 불식하고 잘못되거나 불충분한 사회 제도를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확고한 절차적 평등을 구축해야 한다. 본인은 이것이 올바른 해결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많은 여성운동가들은 오히려 상기 언급했다시피 그러한 잘못된 성역할적 고정관념과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편견을 기반으로 하여, 잘못된 결과적 평등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이 그러한 노선을 고수하는 한, 무의미한 성대결과 상호 비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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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라이 2014.12.29 16:38 신고

    이 블로그 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http://blog.naver.com/davide95

    • BlogIcon WeirdSoup 2014.12.29 17:30 신고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이 글이 읽기 힘들다는것? 물론 제가 글을 일부러 만연체로 꼬아서 쓰는 나쁜 버릇이 있긴 하지만, 이 글 자체는 어떠한 특이하거나 독창적인 개념이나 어휘 따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작성한, 길이가 길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특이하지 않은 글인데(심지어 본인의 여타한 글에 비하면 그리 심각한 만연체도 아니고 별로 꼬아놓지도 않음), 이걸 읽고 그러한 감상을 받았다면 본인의 지적 수준이나 공감능력(읽었는데 이해를 못한 경우), 또는 게으름이나 인내력 부족(글이 너무 길어서 스크롤을 내린 경우)을 탓하시길.

  2. 에라이 2014.12.30 01:09 신고

    아니 그 밑에 있는 주소에 있는 블로그 장 글이 어떠냐고요.
    님이랑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궁금해서 썼어요
    평소에 글 쓰는 거에 콤플렉스 있어요?

    • BlogIcon WeirdSoup 2014.12.30 03:05 신고

      뭐 어떤 글인지 알아야 대꾸를 하던말던 하죠. 대충 훑어보니까 당최 무슨말인지 알아보기 힘든 글들만 써놨던데 그걸 떡하니 들이밀면 당연히 시비거는줄 알죠. 뭐가 상반된 의견인지도 모르겠고 대부분 외계어만 잔뜩 쓰여 있는거 같던데...

  3. BlogIcon . 2015.01.07 21:14 신고

    어..갑자기 이런 말씀 드리면 안믿기실 수도 있는데...진짜ㅠ...좋네요. 위로도 많이 받았고..
    감사합니다. 자주 들를게요.
    정말 잘 읽고있습니다.

  4. 잘썼네 2016.08.04 01:37 신고

    맞는말이구먼 결과적평등도 여자한테나 적용되는거지 일반적으로 초등생때 남자가 여자보다 그림 못그리는데 그걸 남자라고 봐주는건 못봤어도 학창시절 내내 여자라고 체육점수 기준 완화하는건 많이봄

인생은 결국엔 허무하다는 귀결은 잘못됐다. 



나는 원래 염세주의자다 


그래서 제일좋아하는 철학자도 쇼펜하우어이고. 


종교따위도 믿지않는다. 어차피 공허한 세상을 못견뎌 허상을 믿는거니까. 



어떤것을 해도 초월적인 기쁨을 주지 않으며, 단순한 욕망에 사로잡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특이점이후 150억년이 흘렀지만, 내 인생은 아둥바둥해도 결국 1세기를 넘길까 말까. 


내가 죽고나면 내 시체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거나, 내 뼈들은 풍화작용으로 가루가 되어버리겠지 



결국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노무현전대통령이 유서에 이런글을 남겼지. `죽음또한 삶의 일부다`라고.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우리를 만들었던 자연이라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거해서 예측할수없는 양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우연에 의해서 내가 탄생한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는 단지 우연인가? 


아니다. 우연이기때문에 좋은것이다. 우연이기때문에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목적을 설정할수있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인생과 내 삶의 목적을 정해놔버렸다면 우리가 사는 삶은 허무의 극치일것이다. 


연극판의 꼭두각시인형일 뿐일테니까. 



재미있지 않은가? 


정해져있는것은 아무것도없고, 스스로 의미를 찾기 나름이다. 


무기체들은 누릴수 없는 여러가지 화학반응을 우리는 경험할수 있으며, 좁은 범위이지만 사고라는것도 해볼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의 결론은 삶에 향한 의지였다. 


그는 삶자체에 염증을 느꼇지만 80세가 넘는 나이까지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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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 2015.01.07 21:16 신고

    이 글이 가장 좋아요.
    따로 저장하고싶을 정도로!


이 사건은 인터넷 기사로 접하게 되었는데, 사실 기사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봤을 거라고 생각해서 링크는 걸지 않는다.

난 처음 보고 들은 생각은 상당히 모순적 비극이라는 것이었다. 80대의 할아버지는 살았는데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한 18살의 손자는 죽었으니 말이다.

그 후에, 과연 내가 왜 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저 생각이 과연 정당한지를 생각해 봤다. 이는 분명 무의식적인 사고의 반응이고, 어떠한 논리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꽤 많은 사람들이(비판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최소한 둘 다 죽지는 않고 한명이라도 살았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너머의 비극을 본다. 어쩌면 거기에서 살아난 할아버지에 감정 이입이 되어서 그런건지도 모른다. 그 할아버지는 분명 차라리 자기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후회와 탄식 속에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한 단계 나아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가? 할아버지가 죽고 손자가 살아난 것 보다, 할아버지가 살고 손자가 죽은 사건이 왜 특별히 더 비극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결국 사람들의 생명이 모두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밖에 안 된다. 누군가의 생명은 다른 누군가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즉 모두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위에서 예시를 든 두 가지 경우는 모두 동등한 정도의 비극을 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굳이 예를 들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사람 생명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고 그 선택에 있어서 더 좋은 선택과 더 나쁜 선택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사람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의 또 다른 증명이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확실하며 우리 모두가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고 환상적인 평등/평화/사랑 따위의 동화적인 감상에 사로잡혀서 이 사실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모든 사람이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뛰어나고 위대한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자에 비해 더 우월하다. 지하철 노숙자가 스티븐 호킹과 결코 동등하지 않다.

당신은 열등한 종자로 전락하고 싶은가, 우월한 인간으로 도약하고 싶은가?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생명이 결코 동등하지 않으므로, 당신이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당신이 다른 누군가와 동등한 가치를 보장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우월하고자 하는 자만이 진정 우월해진다. 힘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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