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의 문제점

본인이 폭서(Circle of the Tyrants)에 올린 글 펌 (http://cafe.daum.net/extrememetal/BBq0/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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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모 유명 메탈사이트 때문에 생각나서 간단히 써봅니다.

사실 그 사이트의 경우는 애초에 앨범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불성설인데, 그 이유는 그 사이트 자체가 철저하게 "취존"(취향존중)의 베이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주관주의의 대표적인 수렁인 "취존"은, 근본적으로 뭐가 좋은 음악이고 나쁜 음악인지 말하는 것 자체를 봉쇄시킵니다. 나에게 좋은 음악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음악일 수 있고, 나에게 나쁜 음악도 누군가에겐 좋을 수 있으며,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을 존중해 줘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점수를 매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취존"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객관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에 놓여 있으므로,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좋다 나쁘다를 말할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내 기분에 따라 좋으면 높은 점수, 낮으면 나쁜 점수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수는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 무의미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관주의자들이 앨범에 점수를 매기는 것은 우스운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주관주의를 부정하더라도, 심지어 몇몇 분들처럼 극단적 객관주의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더라도 앨범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는 부적절한 행위입니다. 그 이유는, 어떠한 점수 체계를 사용하든 기본적으로 0점과 만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술성에 0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혹은 만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논의가 등장할 수 있으나, 이 글의 주제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문제이므로 넘어가겠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점은, 이러한 점수 체계의 한계에 따른 불합리한 부분입니다.

점수를 매기는 가장 유명한 메탈 사이트인 아카이브의 점수 체계에 따르면, 0점부터 100점까지의 점수를 매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에 따라 이러한 점수를 매겨야 할까요? 가령 예를 들어, 다양한 음악적 수준을 가진 1000개의 앨범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면, 어떻게 매겨야 할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각 앨범의 음악성을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앨범을 일렬로 세우는 등의 문제는 일단 넘어가기로 합시다. 즉, 저 앨범들은 1000등부터 1등까지 일렬로 세울 수 있어서, 그렇게 세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우리가 줄 수 있는 점수는 0점부터 100점 까지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899개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떤 앨범을 들어보고 지존급이라고 생각해서 100점을 매겼습니다. 그 후에, 또 다른 지존급 음악을 들어보고 이것도 100점이라고 리뷰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두 앨범의 음악성이 과연 완전히 동일할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현실상 불가능하다고 친다고 해도(그럼에도 사실, 개인별로 다를 수는 있지만, 분명 두 앨범 중 더 나은 것 하나를 굳이 고르라고 하면 다들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들면서 하나씩 고를 가능성이 큽니다), 가령 음악의 신이 존재하여,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음악성을 가린다면, 분명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더 뛰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점수는 똑같이 100점인 것입니다.

이는 물론 0점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 중간에 존재하는 1부터 99까지의 점수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점을 쓰자구요? 애초에 아카이브에서는 소수점을 쓸 수도 없고, 만약 이를 허용한다고 해도 사실 지리멸렬하게 될 뿐입니다. 정말 소수점 몇 자리까지 쓰면서 명확하게 점수를 매기고 싶다면, 우선 상기한 "모든 앨범을 일렬로 세우는 행위"부터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후에, 저기서 부차적으로 언급한 "0점짜리 앨범이 존재하는가, 100점짜리 앨범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수학적인 분석에 따라 각 앨범에 점수를 줘야 합니다.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아 그렇다면, 각 점수를 "클래스" 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즉, 100점은 "100점짜리 클래스" 라는 것처럼.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점수"라는 것입니다. 클래스와는 다릅니다. 예컨대,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매기면, A+에 해당하는 사람들 집단이 있을 것이고, A, B+ 등등 몇몇 그룹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A+이라고 해도, 누구는 백분율 100%, 즉 1등이고, 누구는 2등, 누구는 3등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점수"라 함은 이러한 백분율을 가리키는 것이지, A+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개념을 혼동하여 사용하게 되면 의미 전달에 있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앨범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솔직히 말해서, 세밀하고 정확하게 점수를 매기려 노력한다고 해도, 그러한 행위는 아주 좋게 봐야 시간 때우는 취미생활에 불과할 뿐 뭔가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저는, 이렇게 점수를 매김으로써 지리멸렬하게 1점 차이에 고민할 게 아니라, 그냥 클래스를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클래스는 다양하게 나눌 수 있지만, 솔직히 다양하게 나누어 봐야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그닥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3단계면 충분합니다. 구린 것, 들을만한 것, 좋은 것. 구린 것에 전체 앨범의 약 95% 이상이 속할 것이고, 이러한 음악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들을만한 것은 그걸 듣는다고 해서 나쁠 건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들어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좋은 것은 꼭 들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입니다. 물론 이것들 사이에서도 지존급, 준 지존급 해서 나눌 수는 있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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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서의 논의

 

 

 

Pentagram 14.08.15. 09:07

'일렬로' 세우는 문제는 그냥 넘어갈 게 아니라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레이디빠가 14.08.15. 09:45
그건 예를 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거죠. 1등부터 1000등까지 일렬로 세운다 하더라도 0점부터 100점까지 딱 정해져 있는 점수체계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설명하려고...

그래서 아랫부분에도 그 문제부터 선행되어야 한다고 써놨죠. 사실상 아무리 소숫점을 쓴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긴다는 건 현재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Esoteric 14.08.15. 23:17
Jonathan Bowden 선생님이 에볼라에 대해 하신 말씀 중에 보면 대충 에볼라는 모든 것이 위계질서적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바그너, 니체, 셰익스피어 등 좋은 것들 사이에도 우열이 있음을 믿었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음악이란 범주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죠. 물론 기븐님 말대로 그게 현실적으로 완전하게 하는게 가능하지는 않지만, 일렬적 위계질서라는 이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다른 것을 놓질 정도로 그것에만 집중하면 안되겠지만).
 
 
Esoteric 14.08.15. 23:14
이건 '앨범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의 문제점'이라기보단 '점수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 점수를 책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의 문제점'이라고 불러야 맞을거 같군요. 점수는 해당 앨범의 수준에 대한 정보를 짧은 시간안에 전달한다는 점에서 상황에 따라서 충분히 유용할 수도 있고, 0점이나 100점은 그냥 점수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상황에 따라 말로 설명하면 되는거지 무슨 형이상학적 의미가 그 숫자들에 내재되어있는 것은 아니죠.

그걸 떠나서 '자격 심사 없이 아무나 1인 1표로 점수를 주고 그 평균을 내는 방법' 아래에서 나오는 평점이 의미가 없다고 보기는 합니다.
 
레이디빠가 14.08.15. 23:37
뭐 평점은 당연히 아무 의미가 없죠. 막말로 개나소나 다 올리는데다 자기 맘에 안든다고 낮은 점수 줘도 막을 수도 없으니

상황에 따라 말로 설명하면 되는데, 전 개인적으로 그냥 말로 설명하는 게 굳이 점수를 붙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나은 거 같네요. 점수가 비록 말씀하신대로 짧은 시간 안에 전달할 수는 있긴 해도, 문제는 그것이 본문에 써 놓은 이유 때문에 매우 불완전하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다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으므로 결국 제대로 알려면 설명까지 다 읽어봐야 하는데, 달랑 점수만 보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걸 전달할 수 있나 싶네요. 애초에 이 카페 리뷰도 점수따위 안 매기지만 크게 문제있는 것도 아니고
 
레이디빠가 14.08.15. 23:45
점수라는 건 말 그대로 점수죠. 그 점수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히, 높은 점수의 대상은 낮은 점수보다 더 낫고, 서로 동등한 두 개체라면 그 점수 또한 같다는 것이죠. 일종의 아주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객관적 지표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걸 이런 식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예컨대 "본인이 말하는 100점은 객관적 수치로서의 100점이 아니라 최고 등급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고 미리 따로 정의내리면 되긴 합니다. 근데 그렇지 않거나, 혹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그저 수치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에 문제죠.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설명을 봐야 하는 것이고..
 
레이디빠가 14.08.15. 23:52
근데 실은, 이러한 사실, 즉 점수라는 게 이렇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그 점수를 보는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긴 합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목숨을 걸고 "A가 B보다 더 나은데 왜 A는 88점이고 B는 89점이냐" 라고 시비거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그런데 결국 이 사실은, 점수라는 게 이처럼 별 중요한 의미가 없다는 사실 또한 의미합니다. 결국 차라리 점수를 안 매기는 게 매기는 것보다 오히려 나으면 낫지 못하지는 않다는 거죠. 그 유용함보다 오히려 문제점이 더 많으므로... 정보를 짧은 시간안에 전달하는 것들은 대표적으로 신문 헤드라인이 있는데, 불완전하고 때론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헤드라인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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