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왜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에서 찾으려 하는가?

오히려, 그것이 더욱 인간을 공허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의 표상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으로 있을 때 그 모든 불안감과 공허한 단절을 해소하기 위해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여 의지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 속에서 거짓된 평안을 누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충분히 성장한 인간 자아에게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어머니의 품 따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부피에 비해, 어머니의 품 속은 너무나도 비좁다.

성경에 보면 커다란 금송아지를 만드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그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싸움 등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여튼 그것의 본질적 의미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커다란 금송아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그 커다란 금송아지의 허구성과, 12월 25일에 태양과 함께 탄생한 그 인물의 허구성이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사실 그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논리도 증거도 없는 비합리적 자기기만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 논리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이는 사실 진화학적으로 설명된다. 어린아이는 부모(혹은 원로 등)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생존장치의 부산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원초적 믿음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기만해서 얻은 그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 곳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그것에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배척한다.

슬픈 일이다. 어리석고 불쌍하다. 마음 속 커다란 금송아지가 그들의 미덕이고 그들의 존재가치이다. 앞서 성숙한 자아에게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을 통해 자연적으로 우리는 사실 그 어머니라는 것 자체가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자아는 태초부터 어머니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성장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너무 약하고 보잘것없고 공허하지만, 그러한 공허의 한 가운데에 홀로 서서 꿋꿋이 성장하는 존재다.

어머니에 의존해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나가는 것은 눈물겹지만 맹목적이고 비참하다. 그런 존재는, 그 어머니가 없으면 그냥 끝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존재의 본질적 가치는, 어떤 가상의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다. 신이라는 허상에 빼앗겨버린 인간 본연의 자아와 존재를 되찾고, 자기 자신의 본질적 인간성을 되찾자. 인본주의를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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