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압도적인 절제의 미학, Manilla Road - The Ninth Wave
7분 10여초대 부터는 한 차례의 분위기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는 이어질 후반부의 클라이막스 부분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윽고 등장할 보컬의 강렬한 표출을 받쳐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후반부의 메인 멜로디와 리프는 전반부와 동일하지만, 중반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한 분위기와 앞서 등장한 파트로 인해 강렬한 클라이막스를 조성하는데, 이는 동일한 재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분위기"의 조성과 진행을 바탕으로 곡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진행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직선적인 단순한 구조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는 에픽성을 달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한 멜로디를, 음 높이를 한층 올려서 내지르는 보컬 파트는 거대한 영광스러움, 혹은 압도적인 사건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클라이막스 이후 부분이 사실상 이 곡의 백미인데, 메인 절 부분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때, 클라이막스 부분은 절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그 부분을 위와 같이 높은 음으로 내지른 다음, 사실상 이 전반부가 고조된 느낌의 멜로디라고 할 수 있는 후반부 절 부분을 오히려 낮은 음으로 읊조리듯 부르고 나서 보컬 파트가 퇴장한다. 즉, 멜로디 진행상으로는 전반부보다 더 고조된 느낌을 표현해야 할 후반부인데, 보컬 창법은 오히려 더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순적인 부분은 두 가지 점에서 탁월한데, 우선 한 가지 이유는 아래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나머지 이유는 이어지는 코다 부분과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보컬이 끝까지 내지르면서 끝났다면, 서서히 엄습하며 다가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꿈틀대며 물러가는 마무리 부분과 다소 이질적인 분위기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절제하면서 끝난 덕분에 자연스러운 극후반부를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거대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 곡이 마무리된다.
이처럼 이 곡은 직선적인 구조와 간결한 리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분위기의 조성"을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에픽을 달성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인 중후반부의 에픽 기타솔로를 제외하더라도 리프와 멜로디의 진행이 전체적으로 곡에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청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9분이 넘어가는 곡에서 이처럼 심층적이지 않은 구조와 적은 수의 일반적인 리프를 바탕으로 곡을 전개하는 경우에는 지루하고 단순한 무의미한 곡이 될 확률이 높다. 대표적으로 아이언 메이든의 몇몇 지루한 곡들을 떠올려 보면 되는데, 이 곡은 분위기의 진행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이 곡의 전부였다면, 본 필자는 이 곡을 따로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곡의 진정한 백미는, 바로 "절제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에픽적인 곡들이라던지 기타 인상적인 메탈 곡들을 보면, 절제하기보다는 강렬하게 폭발하고 강한 공격성을 표출하며 있는 것을 모두 쏟아붓는 화력을 자랑하면서 메탈 특유의 헤비함을 달성하려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곡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극적인 순간에서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근엄한 무게감을 표출하는 "황제"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빈 수레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꽉 찬 수레는 오히려 조용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 곡의 전체적인, 엄습하는 듯한 멜로디의 리프도 그렇지만, 특히 보컬 파트가 이러한 부분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메인 절 부분에서 이 보컬은 계속 낮게 읊조리는 듯한 방식으로 가사를 전달하는데, 단순히 힘 빠진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비브레토의 사용으로 묘한 열기를 느끼게 한다. 앞으로 벌어질 거대한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그러나 감히 함부로 촐싹거리며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듯한, 절제되어 있는 강한 열정을 들려주는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클라이막스 이후 부분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앞서 말했듯이 더 고조되어야 할 부분에서 오히려 더 절제함으로써, 무언가 함부로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 즉, 힘이 빠져서 축 처지는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를 억제하는 모습을 바탕으로, 오히려 빙산의 일각에는 드러나지 않는, 수면 아래의 거대하고 실로 압도적인 빙산의 본체를 암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앞선 클라이막스에서의 샤우팅은 단지 수면 위에 잠시 드러난 빙산의 끝 부분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는 감히 목도하기 힘든 압도적인 본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실로 거대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메탈 장르에서 이처럼 절제의 미학을 탁월하게 선보이는 곡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타 장르와는 달리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내지르는 것보다 더욱 강렬한 무언가를 묘사하는 이러한 모습은 오로지 메탈과 일부 클래식 같은 거대한 표현형식의 장르만이 재현 가능한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옥좌 위의 황제와도 같고,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빙산과도 같은, 거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탁월하게 에픽적인 가치를 지닌 곡이다. 이 곡보다 좋은 곡은 많지만, 이처럼 일반적인 재료를 바탕으로 에픽적 분위기를 형성하며 절제의 미학을 선보임으로써 거대한 무언가를 묘사하는 곡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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