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압도적인 절제의 미학, Manilla Road - The Ninth Wave

(이 글은 폭서 (http://cafe.daum.net/extrememetal/) 게시판에 본인이 올린 글을 백업용으로 긁어온 것이다.)




본 곡은 마닐라 로드의 "Open The Gates" 앨범에 수록된 9분 30여초의 곡이다.

마닐라 로드는 통상 "에픽 헤비/파워메탈"이라고 불리는 밴드로서, 올드한 스타일의 구조와 리프를 갖고 특유의 에픽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특징인 밴드인데, 오늘 이야기하는 본 곡 또한 그러한 에픽 스타일의 곡이다.

마닐라 로드의 곡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즉 에픽을 달성하기 위해 복잡하고 정교한 기승전결이 돋보이는 비선형적 구조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절후렴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리프 또한 일반적이고 멜로디도 통상 헤비/파워메탈에서 볼 수 있는 그것들이라, 각각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냥 별 볼일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평범한 재료를 바탕으로, 다른 평범한 밴드에서는 찾기 힘든 거대하고 판타지적인, 에픽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특이하고도 상당한 재능을 보여주는 곡들을 다수 만들어 냈다.

그 중에서도 본 곡은 더욱 주목할 만 한데, 주의할 점은 본 곡이 이들의 최고의 곡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다른 곡들 중에서는 이 곡보다 더 간결하면서도 더 거대하고 에픽적인 명곡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선곡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특유의 "분위기로 조성하는 에픽"의 방식을 극대화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 곡이 "감정의 표출과 폭발"이 아니라 "감정의 절제와 인내"를 바탕으로 더욱 거대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곡은 9분 30여대의 대곡 치고는 다소 일반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다만 일반적인 절후렴 구조는 아니고, 후렴구 없이 인트로에서 절이 몇 차례 반복된 다음 새로운 보컬 구절과 새 리프-기타 솔로가 존재하는 중반, 그리고 다시 절이 반복되는 후반부로 이어지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구조이다. 템포 또한 전체적으로 천천히 전진하는 미드템포를 갖추고 있고, 등장하는 리프 또한 그리 많거나 복잡하지 않다. 마닐라 로드의 주요 특징이기도 한, 길고 화려하며 멜로디컬하고 변화적이며 결과적으로 에픽적인 기타 솔로가 길게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면 내용상으로는 5~6분여대의 곡 정도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매우 거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우선 약 1분 20여초의 인트로 구간동안 뚜렷한 리프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느낌을 조성하는 멜로디의, "엄습하는 듯한" 느릿느릿한 연주가 이어진다. 이러한 길고 미스터리한 인트로를 바탕으로 청자를 단 1분여의 시간 내에 현실 초월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동시켜 놓는다. 즉, 복잡하고 거대한 에픽적인 연주 없이, 단편적인 멜로디의 기타 연주와 서서히 몰려드는 드럼 연주만으로 "분위기"를 조성하여 이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메인 리프 또한 인트로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는 느낌의 멜로디를 연주하여, 세계관의 단절 없이 거대한 서사시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메인 리프의 멜로디는 메인 절 부분의 보컬 멜로디와 같은데, 보컬 없이 1차례 연주됨으로써 곡의 주제를 먼저 청자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이윽고 이어지는 보컬의 낮게 읊조리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목소리는, 불길하고 거대한 판타지적 사건을 차근차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야말로 "서사시"적이다. 이 부분이 끝나면 새 리프 구간으로 돌입하는데, 이 리프의 멜로디는 좀 더 높은 음을 사용함으로써 좀 더 고조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 부분의 보컬 멜로디 또한 낮게 읊조리는 부분에 비해 더 높은 음을 사용하고 템포도 좀 더 빠르며,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고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에 등장하는 기타 연주 또한 점점 화려해지는데, 이를 바탕으로 중후반부의 길고 계속 변화하면서도 기본 리프의 발전과정의 연장선상에 정확히 위치하는 화려한 기타 솔로로 진입한다.

(중간 중간에 이들 파트를 연결하는 짧은 연주들 또한 주제의 단절 없이 효과적으로 각 파트를 연결하고 있다. 또한 배경에는 계속 "울부짖는 듯한", 인트로 파트와 비슷한 느낌의 기타 연주가 지속되는데, 이 또한 "분위기 조성"에 밀접하게 기여한다.)

7분 10여초대 부터는 한 차례의 분위기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는 이어질 후반부의 클라이막스 부분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윽고 등장할 보컬의 강렬한 표출을 받쳐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후반부의 메인 멜로디와 리프는 전반부와 동일하지만, 중반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한 분위기와 앞서 등장한 파트로 인해 강렬한 클라이막스를 조성하는데, 이는 동일한 재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분위기"의 조성과 진행을 바탕으로 곡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진행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직선적인 단순한 구조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는 에픽성을 달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한 멜로디를, 음 높이를 한층 올려서 내지르는 보컬 파트는 거대한 영광스러움, 혹은 압도적인 사건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클라이막스 이후 부분이 사실상 이 곡의 백미인데, 메인 절 부분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때, 클라이막스 부분은 절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그 부분을 위와 같이 높은 음으로 내지른 다음, 사실상 이 전반부가 고조된 느낌의 멜로디라고 할 수 있는 후반부 절 부분을 오히려 낮은 음으로 읊조리듯 부르고 나서 보컬 파트가 퇴장한다. 즉, 멜로디 진행상으로는 전반부보다 더 고조된 느낌을 표현해야 할 후반부인데, 보컬 창법은 오히려 더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순적인 부분은 두 가지 점에서 탁월한데, 우선 한 가지 이유는 아래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나머지 이유는 이어지는 코다 부분과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보컬이 끝까지 내지르면서 끝났다면, 서서히 엄습하며 다가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꿈틀대며 물러가는 마무리 부분과 다소 이질적인 분위기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절제하면서 끝난 덕분에 자연스러운 극후반부를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거대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 곡이 마무리된다.


이처럼 이 곡은 직선적인 구조와 간결한 리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분위기의 조성"을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에픽을 달성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인 중후반부의 에픽 기타솔로를 제외하더라도 리프와 멜로디의 진행이 전체적으로 곡에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청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9분이 넘어가는 곡에서 이처럼 심층적이지 않은 구조와 적은 수의 일반적인 리프를 바탕으로 곡을 전개하는 경우에는 지루하고 단순한 무의미한 곡이 될 확률이 높다. 대표적으로 아이언 메이든의 몇몇 지루한 곡들을 떠올려 보면 되는데, 이 곡은 분위기의 진행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이 곡의 전부였다면, 본 필자는 이 곡을 따로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곡의 진정한 백미는, 바로 "절제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에픽적인 곡들이라던지 기타 인상적인 메탈 곡들을 보면, 절제하기보다는 강렬하게 폭발하고 강한 공격성을 표출하며 있는 것을 모두 쏟아붓는 화력을 자랑하면서 메탈 특유의 헤비함을 달성하려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곡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극적인 순간에서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근엄한 무게감을 표출하는 "황제"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빈 수레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꽉 찬 수레는 오히려 조용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 곡의 전체적인, 엄습하는 듯한 멜로디의 리프도 그렇지만, 특히 보컬 파트가 이러한 부분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메인 절 부분에서 이 보컬은 계속 낮게 읊조리는 듯한 방식으로 가사를 전달하는데, 단순히 힘 빠진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비브레토의 사용으로 묘한 열기를 느끼게 한다. 앞으로 벌어질 거대한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그러나 감히 함부로 촐싹거리며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듯한, 절제되어 있는 강한 열정을 들려주는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클라이막스 이후 부분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앞서 말했듯이 더 고조되어야 할 부분에서 오히려 더 절제함으로써, 무언가 함부로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 즉, 힘이 빠져서 축 처지는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를 억제하는 모습을 바탕으로, 오히려 빙산의 일각에는 드러나지 않는, 수면 아래의 거대하고 실로 압도적인 빙산의 본체를 암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앞선 클라이막스에서의 샤우팅은 단지 수면 위에 잠시 드러난 빙산의 끝 부분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는 감히 목도하기 힘든 압도적인 본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실로 거대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메탈 장르에서 이처럼 절제의 미학을 탁월하게 선보이는 곡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타 장르와는 달리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내지르는 것보다 더욱 강렬한 무언가를 묘사하는 이러한 모습은 오로지 메탈과 일부 클래식 같은 거대한 표현형식의 장르만이 재현 가능한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옥좌 위의 황제와도 같고,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빙산과도 같은, 거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탁월하게 에픽적인 가치를 지닌 곡이다. 이 곡보다 좋은 곡은 많지만, 이처럼 일반적인 재료를 바탕으로 에픽적 분위기를 형성하며 절제의 미학을 선보임으로써 거대한 무언가를 묘사하는 곡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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