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소녀는 지지 않아!" 1권 후기: 대전차지뢰는 아니더라도 발목지뢰쯤?

본인이 대체 왜 저 책을 코믹존에서 집어왔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고 후회가 막심한데, 아무래도 테일즈샵에서 노블엔진과 공동으로 만드는 새 비주얼노벨이 바로 저 책 원작의 작품이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정작 그 게임은 본인이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몇달째 공지만 떴을 뿐 나오지도 않았는데, 솔직히 원작을 보고 나니 게임도 그닥 기대가 안 된다.

 

출판사들마다 보통 "공모전"이라는 것을 하고, 시드노벨이나 노블엔진 같은 회사들도 당연히 각종 공모전을 개최한다. 그러한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이 새 시리즈로 출판되곤 하는데, 본 필자가 여러 사례를 통해 깨달은 사실은, 우리나라 라노벨 출판사들의 공모전 입선작은 전혀 신뢰할 만한 기준이 못 된다는 사실 뿐이다.

 

애초에 무슨 기준으로 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좆망급은 아니지만(특히 "우리집 아기고양이"는 필력이나 구성력 등과는 별개로 충분히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읽을 만한 책이었다), 대체적으로는 이게 과연 상까지 받은 책인가 하는 심각한 의문점이 들게 만든다. 아무래도 그 당시 공모전에 제출된 작품들이 죄다 이것만도 못한 것들이라 이런 작품들이 수상을 한 것 같은데, 어느 기준을 정해 놓고 그에 미만되면 그냥 상 자체를 안 줘야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의 서브컬쳐 업계가 좆망급으로 안습이라 아예 신작이 절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쓰레기같은 걸 독자들한테 신작이랍시고 들이밀고 나서 결과적으로 신뢰도를 0%로 추락시키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몇 개 안 되더라도 제대로 된 시리즈나 밀어 주는게 나을 것 같지만... 뭐 일단 돈이 있어야 하는만큼 돈을 벌어야 하는 출판사들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라노벨이 작품성까지 갖추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 상품성이 우선이 되는 장르이니만큼 일단 "재미"만 있다면 나머지가 다소 허술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공모전 또한, 그러한 "재미"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 상식적일 테고(그래야 팔릴 테니까), 그 외에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만한 흥미라던지 참신한 소재 등등이 부가적인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불행소녀는 지지 않아!" 1권은, 당최 어느 것도 만족하지 못하는 책이다. 본인 같이 작품성 같은 걸 따지면서 읽는 독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일단 작품성을 논하기 이전에 그냥 이야기 자체가 심각하게 노잼이다. 물론 작품성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한 마디로, 상품성이 거의 없다. 물론 이 시리즈도 재미있게 읽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각종 팬픽이나 아마추어 웹소설들도 재미있게 읽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점으로 반박하고 싶다.

 

이를 증명하는 명확한 증거는 판매량인데, 본 필자는 본 시리즈가 증쇄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실제로 지금도 각종 서점에 가 보면, 1권 초판이 아주 널리다 못해 악성 재고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5권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이번달부터는 e북으로도 출시가 되는 만큼, 앞으로도 증쇄가 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유는 명확하다. 노잼이기 때문에 안 팔리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노블엔진과 테일즈샵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다른 작품들도 많은데 왜 굳이 이걸 갖고 비주얼 노벨을 만드려고 하는지... 상식적으로 잘 팔리는, 상품성이 있는 시리즈를 게임으로 만드는 게 맞는 것 아닌가? 뭐 당사자들은 다른 사정이 있을테니 그러려니 한다.)

 

노잼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우선, 소재 자체를 제대로 살리지를 못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솔직히 2권을 살 생각은 1%도 없다), 1권만 보면 분명 상당한 잠재력이 있는(물론 그만큼 다루기 어렵긴 하지만) 소재를 잡아 놨으면서도 그냥 밋밋할 뿐이다. 차라리 "포춘" 과의 치열한 공방이라던지, 압도적인 불운에 맞서서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인간의 의지 같은 거라도 다룰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없다.

 

참고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포춘"이라는 회사의 기술력은 이미 탈 인간급이다. 행운을 마음대로 다루고 이를 통해 실제로 각종 영향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은, 마치 마법과도 같다. 그런 회사가 일개 시드 따위한테 계약을 해달라고 하질 않나, 플랜터들한테 투자 따위를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그 기술력을 통해 행운이 많은 놈을 찾아내서 빨때로 뽑아 먹듯이 쪽쪽 빨아먹어버리면 된다. "포춘"이라는 집단은 비밀 결사 정도로만 남으면 되고, 행운의 이동 및 구현이라는 마법같은 기술을 힘으로 사용해서 세상을 장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작중에 나타나는 행운의 힘을 사용하면 못할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다면, 이를 휘둘러서 압도적인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그런데 찌질하게 회사 따위를 차리고 투자를 받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 부터가 비논리적이고, 무슨 목적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애초에 설정상에서부터 문제점이 존재한다. 뭐 이 점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쳐도, 다른 곳에서 오류가 넘쳐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자.

 

히로인 "주시혜"는 불운을 몰고 다니는 불행덩어리이다. 작중에서 보면 맨날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다니고, 유리파편에 살이 찢기는 등의 사고 따위는 그냥 일상적인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 플롯에서는 그러한 점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오컬트매니아 정도로만 보일 뿐이다. 물론 우연휘의 옆에 있어서 행운이 올라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작 그 우연휘의 행운마저도 모조리 빨아들여서 불운으로 채우는 블랙홀 같던 이미지와는 달라도 매우 다르다. (애초에 우연휘가 불행해지는 일은 특정 사건들로밖에 안 나타나고, 그마저도 뒤에서 이로직이 수작을 부린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우연휘의 옆에 있어서 행운이 올라갔다고 보여지지도 않는게, 예컨대 테마파크에 갔을 때는 온갖 게임을 하는데 단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우연휘가 운명 변환기를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공하게 될 정도이다. 이를 보고 델피나는 불운이 워낙 심해서 일상 생활에서도 운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면 그대로 나타나는 거라고 하는데, 결국 우연휘의 옆에 있어도 그닥 행운이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걷는 걸음마다 재앙이 펼쳐지지 않고 그냥 평범한 소녀 같은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러한 주시혜의 설정 자체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진작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불운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멀쩡히 살아 있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직감" 이라는 요소를 도입했는데, 애초에 이 "직감"이라는 요소 자체가 작가가 중간에 삽입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왜냐 하면, 이 "직감"은 불운과 행운이라는 설정 상에 마땅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이냐면, 이 "직감"이라는 것은 심지어 불운마저도 완전히 씹어먹는다는 사실인데, 이것도 설정이 허술해서 그런지 명확히 이해는 안되지만 대략 작중에 나온 것으로 보자면 "예측 가능한,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큰 재앙" 같은 경우에는 미리 예측하고 회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생각해 보면, 불운을 회피하는 것은 바로 "행운"이다. 예컨대, 옆에 벼락이 내려치는데 자신은 벼락에 맞지 않고 무사하다면 "아, 다행이다" 라고 한다. 또는 버스에서 사고가 나서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자신은 멀쩡하게 걸어나왔다면, "와, 천만다행이다" 라고 표현한다. 즉 운이 좋다면 주변에 강한 불운이 몰아치더라도 그 자신은 무사한 것이 가능한데,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주변의 재앙으로부터 온전히 몸을 보전하고 회피한다면 그것이 바로 "운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주시혜는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주시혜는 운이 엄청나게 나쁘고, "직감"을 통해 재앙을 피한다는 것이 설정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심지어 그 "직감"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 원인 자체가 심각한 불운 때문이다. (작중에 보면 지하철에 머리카락이 낑긴 이후부터 직감이 생겼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불운때문에 막강한 행운을 얻게 된 형국이 되는데... 암튼 시원하게 납득이 안 가고 설정 자체가 꼬인 느낌이 강하다. 결국 이러한 부분 전부가 소재 자체를 제대로 소화를 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보인다.

 

그리고 노잼인 이유 두 번째로, 캐릭터 자체가 매력이 하나도 없다. 아니 "하나도"라고 하기에는 주시혜가 있으니 아닐 지도 모르는데, 주시혜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는 올곧음"이라는 부분이 다소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인 히로인으로써 확 끄는 "모에"라고 하는 강한 매력이 없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솔직히 작중 내내 그닥 뭔가 하는 것도 많지 않을 뿐더러, 주인공에게 그저 "보호본능" 뭐 이런 비슷한 것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물론 주인공 입장에서는 맨날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운 때문에 일이 술술 풀리는 자기와는 달리 뭘 해도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노력하는 점이 강하고 매력적으로 보였을 테고, 그에 더해 "이쁘다"(니미... 이래서 저급하다고 하는 것인데 어쨌든)라는 점이 사춘기 청소년으로서는 옆에 남아서 지켜 주고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근데, 그것밖에 없다. 참고로 다들 알겠지만 라노벨이라는 것은 캐릭터 싸움에 가까운데, 결국 뭔가 확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어야 상품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압도적인 플롯이 있던가, 엄청나게 참신한 소재가 있던가, 철저한 구성력이나 독자를 휘어잡는 문장력 등이 있어야 하는데, 어차피 이 작품은 그런 것들 따위 없기 때문에(앞서 말했듯이 소재는 말아먹었다) 히로인이라도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그냥 그런 것이다.

 

참고로 말해서 작품성 하나만 따지면 이 소설보다 훨씬 쓰레기 같은 것들이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나와 호랑이님" 같은 경우는 작품성 같은거 완전 밥 말아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은 굉장한 베스트셀러이고, 실제로 본인도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이유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야 쓰레기에 가깝지만 최소한 책을 계속 읽고 싶을 정도는 되는 매력이 있고, 캐릭터에는 굉장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라노벨은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 반대로,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본 작품은 비록 작품성은 덜 쓰레기같더라도 별로 읽을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히로인이 아닌 다른 캐릭터는 어떠한가? 이 소설은 저급하게도 (물론 다른 대부분의 라노벨들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얼마나 "덜 저급스럽게" 혹은 "더 재밌게" 포장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보지만) 흔해빠진 하렘 구조를 1권부터 갖추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주 근본부터 심각한 결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개연성의 부족"이다. 캐릭터들이 대체 왜 주인공을 좋아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소꿉친구인 유아미 같은 경우는 나은 편이다. 이 경우도 물론 작중에서는 아무런 떡밥도 없이 그저 좋아하는 묘사밖에 없긴 하지만, 일단 소꿉친구이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설정 구멍을 메울 만한 과거 회상 따위를 삽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간단히 찾아 보니, 필자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다들 주인공들이 대체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메인 히로인이야 여러 플래그들도 있으니 별로 납득은 안 가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수도 있는데, 델피나의 경우에는 도저히 그렇게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뜬금없다. 그렇다. 정말로 뜬금없다. 델피나는 주인공을 좋아할 만한 이유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같이 놀러가자?" 이거 때문에 주인공을 신경쓰고 마음에 두게 되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초딩 수준의 설정이라서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런 마당에, 후반부에 무슨 마음의 진심이 어쩌고하면서 난리치는건 황당할 정도이다.

 

천화령의 경우에는 워낙에 인상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서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인데, 유아미와 더불어서 가슴타령하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질려 버렸다. 도대체 독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필자는 20대 중반이긴 하지만, 이는 10대 중반의 수준으로 보더라도 너무나도 저급하고 형편없다. 무슨 독자들이 "가슴! 왕가슴!" 하면 "우오오!!!" 하면서 발광할 인간들로 보이는가? 너무나도 진부하고 너무나도 저급하다. 똑같이 가슴크기를 내세우는 캐릭터인 "나와 호랑이님"의 나래나 정미 등을 보더라도, 가슴크기가 매력의 전부가 아니고 그저 부가적인 부분에 불과하고, 뭔가 다른 매력을 내세워야 어필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저 가슴 크기만을 외쳐댈 뿐이다. 천화령 같은 경우 그닥 색기를 내세우는 캐릭터도 아니고, 유아미 또한 다소 청순바보 정도의 이미지라서 가슴 어쩌고 하는 것이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특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옷으로 갈아입는 장면은 일부러 성적 어필을 위해 삽입한 것 같은데, 솔직히 전혀 와닿지 않았다. 매력이나 성적 어필은 살을 드러낸다고 생기는 게 아니고, 분위기나 성격, 상황 등을 통해 생기는 것인데 이를 잘 모르거나 표현을 못 하고 이렇게 어색한 상황이나 연출하는 책이 참 많다. 물론 "개와 공주" 에서 몇 번 등장했던, 참을 수 없이 오글거리는 막장 상황보다는 낫긴 한데 어쨌든 캐릭터의 매력을 어필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하겠다.

 

셋째로, 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스토리가 재미없다. 플롯 자체가 지루하고 따분하게 전개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로직과의 승부라던지 후반부 델피나 씬도 집어넣었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솔직히 그저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이로직이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는 점은 예상 못하기는 했지만 처음 등장 때부터 나쁜 놈일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필자는 우연휘가 왜 이로직 같은 놈과 친구를 먹고 친하게 지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통상적으로, 그런 식으로 여자를 갈아치우고 자랑해대고 무슨 즐기는 게 어떠니 하면서 까불고 다니는 인간은 동성들 간에서도 기피 대상이다. (물론 인생 막 사는 양아치들 사이에서는 예외긴 한데 우연휘는 그런 놈도 아니다.)

 

게다가 후반부 델피나 씬에서는 심각한 오류마저 존재한다. 델피나의 운명변환기는 왼쪽 눈인데(오른쪽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므로 생략), 아무리 열심히 읽어봐도 델피나가 사이보그이거나 로봇이라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눈은 진짜 "눈"이고, 어떤 마법같은 기술을 통해 눈으로 보는 것 자체를 운명변환기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델피나는 눈 자체가 운명변환기이므로, 눈을 어디 뽑아놓거나 혹은 포춘에서 그러한 기술을 회수하지 않는 이상 운명변환기를 "놓고 오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중간에 테마파크 정전 사태를 보면, 델피나가 운명 변환기를 하필이면 놓고 왔느니 어쩌니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를 읽는 독자들은 필자를 포함하여 다들 델피나가 초반에 보여줬던 단말기를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델피나는 자신 주변에 귀찮은 사람들이 몰려오자 단말기를 꺼내서 액정을 터치하기도 했고, 우연휘에게 운명 변환기를 설명하면서 야구선수에게 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당연히 그러한 단말기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뜻이겠거니 생각할 텐데, 정작 델피나의 "진짜" 운명 변환기는 눈인 것이다.

 

델피나의 눈은 최소 행운 소모량이 크기 때문에 자잘한 일에는 단말기를 사용한다고 억지로 이어붙인다고 해도, 테마파크 사고 같은 큰 일에서는 그러한 변명이 통하지도 않는데 눈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작중 등장하는 "놓고 왔다는 것"이 막판에 등장하는 그 "눈"이라면, 델피나가 사이보그라서 눈을 교체하면서 다닌다는 말인데 암만 생각해도 심히 억지스럽고 막장이다. (애초에 사이보그라도 운명변환기 기술이 달린 상급 아이템을 놔두고 하급 허접눈을 끼고 다닐 이유도 없다.)

 

뭐 이러한 오류들 때문에 작품에 제대로 몰입되지도 않고 억지스러운 전개는 황당함마저 느껴지게 한다. 이는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무슨 캐릭터 전시회도 아니고 잔뜩 몰려 나와서는 자신의 지분을 독자들에게 참 따분하게도 어필하고서, 델피나는 3급 매니저로 강등되었다고 하고 우연휘는 하이시드 미만의 존재가 되어서 강제로 계약을 맺게 된다. (이것만 봐도 뭔가 억지스러운 점을 알 수 있는데, 애초에 상급시드니 뭐니 하면서 계약이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필요가 있다면 그냥 강제로 시드로 삼으면 그만이다. 애초에 "포춘"같은 압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에서 일개 일반인 따위의 사정을 봐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고서는 무슨 스마트폰에 운명변환기가 다운로드 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운명변환기를 사용할 수 있는건 상급시드 이상의 특권이라고 첫부분에 분명히 나온다. 그런데 왜 강제로 계약된 노멀시드 이하의 존재 주제에 운명변환기가 주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암튼 이러한 점들 때문에 재미가 없다. 당연히 작품성 따위를 논할 껀덕지도 별로 없다. 애초에 재미는 있지만 작품성은 다소 모자란 작품은 있어도, 심각하게 노잼이면서 작품성만 좋은 작품 따위는 없다. (무슨 너무 심각하게 심오하거나 심각해서 재미가 없거나 하는 경우는 당연히 다른 문제이다) 본 필자는 이 소설을 사서 책장을 차지하게 한 것이 너무 후회가 되서 그냥 무료나눔 이벤트로 뿌려버리려고 했는데, 다소 황당하게도 외전 부록책자를 읽어보고 그냥 소장하기로 했다. 본편보다 외전/헌정 단편의 퀄리티가 훨씬 높다.

 

우선 NEOTYPE의 헌정 단편은 매우 깔끔한 개그물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는데, 별로 기억에 남거나 생각할 거리 따위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딱 가볍게 읽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책장을 덮기에 딱 좋고 충분한 단편이다. 깔끔한 필력은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들고, 나름 흥미진진하면서 본편과 묘하게 연결도 되고 골때리는 재미와 반전도 있는 스토리는 정말 깔끔하다.

 

주시혜와 동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외전 단편은 본편과는 달리 주시혜의 불운의 무게가 새삼 크게 와닿는 단편인데, 주시혜가 갖고 있는 불운으로 인해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되는 본인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심정, 그리고 주시혜가 갖고 있는 내면 깊은 죄책감 등이 상당히 공감 가능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동생 주서혜의 시점에서의 이야기가 담긴 편은 상당히 마음 아픈 심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동생이 갖고 싶다는 인형을 뽑기 위해 가진 돈을 쏟아부으면서 인형 뽑기에 도전하지만 끝내 전부 실패하고 가게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주시혜를 보는 장면에서는 누구나 마음 아픔과 고마움, 그리고 불운에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앞으로 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의외의 발견 수준의 짧은 명작이다.

 

이를 보면 이 작가는 긴 이야기를 쓸 만한 역량은 부족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짧은 단편에서는 본편보다 훨씬 나은 깔끔한 전개와 읽을 만한 스토리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뭐 이건 좋게 말한거고, 나쁘게 말하면 단편은 읽을 만 하게 쓰지만 수백페이지 이상의 책을 제대로 쓸 능력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단편을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버리거나 무료나눔 등으로 없애버리려는 생각은 접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2권을 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10점 만점으로 보자면 5점 이하의 책이다. 반드시 피해야 할 대전차지뢰 급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읽은 시간을 보상해주지는 못하는 발목지뢰 정도는 되려나?

 

참고로 한 가지 언급하자면, 강하고 전염성 있는 불운을 보유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옆동네에서 NZ작가가 "개와 공주", "협박연애"를 통해서 다룬 바 있고, 본 작품보다 훨씬 깔끔하고 납득 가능하게 흥미진진하게 풀어 나간 경력이 있다.

 

 

 

(본인이 라노벨 독후감 같은걸 잘 안 쓰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쓴다면, 꼭 언급해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은 점일 수도 있고 나쁜 점일 수도 있는데, 본 작품은 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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