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트루컴뱃:엘리트"가 없었다면 "기븐"은 존재하지 않았다

때는 8년 전, 내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그때 당시만 해도 완전 모범생에 착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었다.

 

전혀 상상이 안 되겠지만, 난 욕이라고는 거의 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였다. 당시에 내가 하던 가장 심한 욕은 "개새끼"였는데, 매우 빡쳐서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때 하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존나 웃기지만, 당시에 나는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다만 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았던 부작용으로, 1학년때 내신을 완전 망쳐놔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과학경시대회 공부를 하고 있었다.(이는 우리 과학쌤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차후에 과학경시대회 가산점이 없어짐으로 인해(맞나?) 이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의 나는 완벽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고, 낮잠이라고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조는 것은 상상도 못 했었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정도(正道)를 걷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나의 삶에는 파국이 찾아왔다.

 

그 시작은 바로 내 절친들이었다. 2학년에 올라오면서 새로 사귄 몇몇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항상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결국 나는 그들에게 완벽하게 물들게 되었고, 나는 곧 친구들 사이에서 욕을 제일 잘 그리고 많이 하는 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내 온갖 별명들은 다 욕과 관련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이 타락의 시초였다. 이때 배운 욕하는 습관은 성인이 된 지금도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 때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습관은 고치기 힘드며, 특히 늦게 배운 도둑질에는 밤 새는 줄을 모른다는 것을.

 

우리 담임 선생님은 체육선생님이었는데,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학생들과 소통하고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선호하고, 목표로 하고 교직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남학생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뭐니뭐니해도 게임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스타크래프트였다.

 

물론, 나는 그런 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도 물론 게임을 했었는데, 그건 전부 다 싱글 플레이 게임이었다. 난 스토리가 있고 기승전결이 확실한 걸 좋아했지, 무한 노가다의 의미 없는 삽질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흑의 순간이 찾아왔다.

 

CA 시간이었다. 그 날은 특별히 야외 활동을 하는 날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당시로써는(그리고 지금 생각해 봐도 충분히) 매우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바로 "단체 PC방"이 그것이다. 반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PC방에 가는 것이었는데, 나는 물론 피시방 따위는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기 싫었으나 단체활동이라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되었다.

 

난 물론 거의 아무것도 안했다. 담임쌤이 남자애들 전체와 함께 스타 리그를 했는데, 난 당연히 첫판에서 떨어졌다(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 날은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갔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 갈 무렵의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기말고사도 끝났는데 놀아야 하지 않겠냐고. 같이 PC방에 가서 놀자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난 당연히 안 갔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난 이미 PC방에 한번 다녀온 사람이 아니던가? 그 전과는 달리, 난 PC방이 무슨 곳인지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는지도 잘 알게 되었으며, 스타크래프트를 어떻게 실행시키는지도 잘 알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친구들이 가자고 했던 곳이 신장개업이라 천원에 3시간을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내 무한 베틀넷 삽질이 시작된다. 이는 내가 어느 날 전적을 봤는데 "4승 67패"인 것을 보고 그만두게 된다. 물론 그 이후에는 유즈맵을 했었다.

 

그렇게 내 중학교 2학년을 타락과 함께 마감했다. 3학년에 올라갈 당시, 나는 이미 과고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점수를 받으면서 지냈었고, 물론 매일 PC방에 갔다. 부모님께는 끝나고 도서관에서 책보는 것 처럼 이야기했다(실제로, 2학년 때는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문 닫기 전까지 책을 보다가 집에 오곤 했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질렸고, 나는 내 본연의 장르인 FPS를 파기로 했다. 그런데 할 만한 게임이 없었다. 내 독특한 취향을 만족시켜 줄 만 한 것이.

 

퀘이크3도 하고, 카스도 하고, 그 외 여러 가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획기적인 게임을 발견하고 만다. 그것은 바로, "울펜슈타인:에너미 테리토리"이다.

 

이 게임은 정말 위대한 멀티플레이 게임이다. 협동 중심의 멀티플레이 FPS에 있어서 "트루"라고 할 만하다 (오히려 그 당시의 배틀필드는 "폴스"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다.)

 

여튼, 그러한 게임을 하다가, 국내 카페에도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보았다. 운명의 그 게임을.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뒤흔들어 놓고서도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날 슬프게 하는, 그리고 추억하게 하는 그 게임을.

 

바로 "트루컴뱃:엘리트"였다.

 

원래 트루컴뱃은 퀘이크3의 모드(MOD)였는데, 무료 게임인 울펜슈타인:에너미 테리토리가 나오자, 트루컴뱃 개발팀이 그 게임의 모드로써 새로 제작한 것이 "트루컴뱃:엘리트"이다.

 

그 게임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지금 하면 별로지만, 그 당시 존재하던 게임들 중에 극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몇몇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게임을 제외하면, "게임성"을 살린 게임들 중에 있어서 가장 사실적인 게임이었다.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난 지금도 그 게임을 생각하면 마치 그 게임을 하는 것 마냥 즐거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정도로 그 게임은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위대했다. 마치 에소테릭이 파니스크를 찬양하는 것 처럼 나는 트루컴뱃:엘리트를 찬양했다. (어느 정도냐면, 내 오래된 친구들 중에 트루컴뱃:엘리트를 모르는 놈이 없고, 많은 애들이 직접 해보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러나 엄청난 단점이 한 가지 존재했다. 그 게임은 너무나도 마이너한 게임이라서,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한국 유저들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이 위대한 게임을 널리 알리기로. 한국 플레이어들을 엄청 많이 양성하고, 클랜도 만들고, 많은 게임 매니아들에게 이러한 좋고 재미있는 게임을 널리 보급하기로.

 

그리하여 역사적인(불행히도 지금은 역사로만 남은) 카페가 만들어진다. 바로 "트루컴뱃:엘리트 한국 네이버 카페"였다.

 

난 그것을 만들기 위해 종이에 여러 초안들과 카페 컨텐츠 유지를 위한 각종 게임 가이드와 팁, 도움말 등등을 엄청나게 적었는데, 난 아직도 그 종이들을 갖고 있다.

 

여튼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서 카페를 만들고, 네이버 지식인 등 인터넷에 엄청나게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들의 결실로써, 드디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처럼 열성적인 사람들을 스텝으로 임명하고 같이 카페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활동하던 외부 사이트가 네이버 FPS카페인 "에펨포", 그리고.... "디씨인사이드 FPS갤러리"였다.

 

처음에는 엪갤(디씨 FPS갤러리)이라는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온갖 악평 뿐이었다. 디씨놈들은 죄다 비매너에 욕을 달고 살고 네이버카페 테러하러 다니고, 무조건 강퇴 1순위라고.

 

그런데 우리 카페 스텝 중 하나가 엪갤 눈팅족이었는데, 엪갤에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엪갤에는 각종 FPS게임 매니아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엪갤에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즈음에 만든 닉네임이, 바로 "기븐"이었다.

 

본래 닉네임이 없다가 새로 닉네임을 만든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참고로 이전에는 "자운영"이라는 닉네임을 임시로 썼었다. 운영자라는 뜻이 아니라, 꽃 이름이다) 생략하고, 저걸 닉네임으로 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CCM그룹 "GIVEN" 때문이었다. 걔내들이 그룹 이름을 기븐으로 한 이유는 매우 기독교적인 동기였는데, 난 그것에 착안하여 그것을 세속적으로 바꾸고 givengift라는 걸 만들어 냈다.

 

그 의미는, 이 세상에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자(혹은 그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자)라는 뜻이었다. 아이너리하게도 내가 "기븐"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한 행동들 중에 그 의미를 살린 건 별로 없고, 오히려 그 반대(찌질하거나 병신같은 것들)가 훨씬 많았다.

 

여튼 기븐이라는 닉네임으로 디씨 엪갤에서 활동을 시작한 나는, 이후 여러가지 문제(주로 내분이었지만)들로 인해 내가 만든 카페와 뼈아픈 결별을 하고 이후에 결국 트루컴뱃:엘리트를 접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엪갤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중3 말기부터 고1 말기 때까지의 약 1년간의 일이다.

 

그러니,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고1 초반의 상황은 이러한데, 중1 내신을 완전 말아먹고, 중3때도 별로 좋은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학교 내신 최상급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오로지 내신 성적으로 인해 임시 반장까지 맞게 되었었다. 그리고 3월 모의고사를 보는데, 매우 좋은 성적이 나와서 담임 선생님은 "이 정도면 연고대 정도는 들어가겠다"라는 확언까지 하고야 말았다.(물론 약간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트루컴뱃 때문일까, 디씨 때문일까? 고등학교 진학 후 처음으로 치른 중간고사에서, 난 엄청나게 쓰디쓴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수학이었다. 무려 59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점수가 나와 버린 것이었다. 반에서 항상 1등을 다투고, 최고 모범생이었고, 전교권 성적에서 오늘날 서울대를 간 놈들과 자웅을 겨루던 내가 말이다.(약간 과장이다. 물론 서울대 간 놈들이 나보다 항상 잘 했다)

 

그 후로 내 별명이 바뀌었다. 매우 수치스럽게도. 그것은 "오구로"였다. 왜 오구로냐면, "59점의 굴욕"을 약간 일본식 발음이 나게 줄인 것이다. 이후로도 수학 공부를 엄청 했는데, 성적이 잘 올라가지 않았다. 심지어 방학 때 미친듯이 각종 문제집을 하루에 거의 대부분을 투자하면서 풀어댔는데도, 성적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여담으로, 대학교 와서 가장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수학이 없다는 것이었다.

 

힘든 고2 시절을 지나면서, 난 디씨에 매달렸다. 심지어 독서실에 가면 거기 있는 컴퓨터로 디씨질하다가 혼나기도 했다. 그리고 야자를 째고 피시방에 갔다가 엄마한테 걸려서 울며불며 죽네사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난 디씨를 끊지 못했다. 고3때까지.

 

내가 정신차린 건 수능 60일 남았을 때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대학을 갈 수 없고, 내 인생은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한번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컴퓨터고 디씨고 뭐고 다 끊고 미친듯이 문제를 풀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우 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간신히 문 닫고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성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몰락이었다. 나랑 같이 경쟁하던 놈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죄다 일류 대학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데.

 

그때 이후로 디씨질은 하지 않는다. 다만 기븐이라는 닉네임은 남아서,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기븐의 스토리이다. 컴퓨터가 인간을 얼마나 박살낼 수 있는지, 기븐이라는 닉네임이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위대한 게임, 트루컴뱃:엘리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난 그 당시 거의 게임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물론 PC방을 알기 전의 내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 나는 밤을 세워 컴퓨터를 하느라 처음으로 수업시간에 졸기 시작했고, 이후에 그것이 만성이 되어 지금까지도 낮 시간에 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게임이 없었거나, 혹은 내가 알지 못했더라면, 맨날 똑같은 지루한 온라인 게임에 싫증을 느낀 나는 그것을 접고 일상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디씨같은 건 알지도 못했을 거고.

 

트루컴뱃:엘리트를 통해 내가 실제로 얻은 유익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물론 교훈이 그것이 될 수 있겠지만, 별 쓸모 없는 듯 하다. 그보다도, 나는 즐거움을 얻었다. 추억을 얻었다. 희노애락을 얻었다. 그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난 후회를 하고 있는가?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니까. 어쨋든 "기븐"은 만들어졌다.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