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 인어아가씨 외전" (소설) 간단후기 및 생각할 거리 약간

후기라고 하지만 굳이 다 쓸 생각은 없고,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은 중간에 가랑 작가가 쓴 "한여름 밤의 꿈" 편이다. 그렇다고 딱 그것만 쓰기는 좀 그러니까 다른 두 작품도 간단히 언급하자면, 지나가는개 작가가 쓴 단편 "인어아가씨 비긴즈"는 뭐... 노총각 동정 명씨가 좀 안타깝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닥 감흥 없고, 류호성 작가가 쓴 "인어공주의 꿈을 꾸는 소녀"는, 역시 류호성작가 이름값을 한다고 보면 될 정도로 훌륭했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명작이니 그런 건 아니지만, 최소한 원작 게임을 재밌게 했다면 만족 100%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랑 작가는 다들 알다시피 잔잔하면서도 포근하고 가슴 따뜻한 심상을 잘 전달하는 작가이다. (물론 필력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본 작품에서도 필력은 그닥 인상깊지 못했다. 심지어 납작이의 말투에서 자꾸 우아고의 소라가 겹쳐보여서 좀 거시기했다.) 게다가 이 단편의 주인공은 천진난만하면서도 슬픈 뒷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납작이라서 읽기 전부터 기대했는데, 아니나다를까 "한여름 밤의 꿈" 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참고로 말하자면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셰익스피어 희극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추억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본편을 해 봤다면 다 알다시피, 인어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 자신의 기억도 점차적으로 잃게 되는 존재이다. 그 말은, 이 단편소설 남자 주인공인 채성윤은 엄마를 따라 상경하게 되면 이후로는 납작이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될 것이고, 납작이 또한 몇 밤 지나고 나면(필자 기억으로는 본편에서는 하루만에 까먹던거 같은데, 이 편에서는 적어도 이틀은 가는 것 같긴 하다) 채성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작이와 소년은 서로 어울려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만든다. 과연, 당사자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해서 그 시간들이 무의미한 시간일까? 작가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것을 썼을 것이고, 작가의 말에서도 비슷한 말이 있다. 나중에 만나자는 말에 정신이 약간 돌아온 듯한 납작이가 (무슨 이렇게 말하니까 정신병자 같은 느낌인데 ㅡㅡ;;) 참 애잔한 표정을 짓는 묘사가 나오는데, 그 때 납작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다.

 

필자가 말한 약간의 생각할 만한 거리라는 건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인격을 구성한다고 보통 말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기억만 온전하면 자아와 인격도 온전하고, 기억을 잃는다면 이 또한 잃는다는 말이 된다.(참고로 전에 언급한 "개와 공주"라던지 요즘 읽은 "손만 잡고 잤을 텐데" 같은 몇몇 작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약간 기분이 묘하다)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억을 잃는 아주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치매 환자이다. 예전에 필자의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서 자식도 못 알아보고 자기 자신조차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문을 표한 적이 있는데, 과연 기억이 없다면 그 인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기억을 잃은 당사자를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데, 그곳에 과연 자아가 존재할 것이며 여태껏 살아 왔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혼자 계속 고민해 왔고, 누가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본 소설을 읽고 나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비록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이 겪은 여러 가지 사건이나 추억 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 그 결론이다.

 

그 이유로는, 우선 인간은 현재를 살아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과거에 아무리 배 터지게 산해진미를 먹은 기억이 있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내 배고픔을 없애 주지 못한다. 또한 미래에 배고플 지 몰라도, 지금 배부르다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존재는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겪는 모든 일은, 바로 그 현재 속에서 의미를 갖춘다. 이것이 그 후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혹은 그 전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으로 기대되었는지 따위는 현재의 의미에 있어서 그 의의를 상실한다.

 

예전에 노인 병원으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가 몇 분 전에 있었던 일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하고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친구랑 같이 옆에 가서 말동무를 하기도 했었는데, 분명히 그 할아버지는 우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아버지의 말동무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말동무를 하는 그 순간, 바로 그 "현재"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정되면 인간의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길어도 과거 10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향후 100년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게 될 존재들이다.(물론 100살 넘은 분도 때때로 존재하지만, 어감을 위해서 그냥 100이라는 숫자를 갖다 붙였다. 정 꺼림직하면 200년이라고 하자.) 인간의 존재는 "여기에 잠깐" 존재할 뿐인데, 위의 행위가 의미가 없다면 애초에 오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극단적으로, 애초에 살아있을 필요조차 없다. 무에서 발생하고 무로 돌아갈 존재, 그저 없어도 그만이다. 이를 부정한다면, "현재"의 모든 행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추억은 공유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혼자 쌓는 추억도 있겠지만, 이 글의 주제를 따져 보면 같이 쌓는 추억을 말하는 것이고, 예컨대 치매 환자의 경우에 그 자신은 기억을 못 하더라도 옆에서 같이 살아왔던 배우자나 자식 같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본인이 죽고 난 이후라도 마찬가지이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라는 진부한 표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본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어이야기의 경우에는 상대방 또한 인어의 존재를 잊게 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아무리 누군가와 추억을 쌓았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면 그 기억들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이것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 자체는 비록 짧더라도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세 번째로,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는 "기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앞서 말했던 기억이 인격을 구성한다는 것은 100%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표현이 매끄럽지 못한데, "인격을 구성하는 것은 100% 기억만은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두뇌는 애초에 그리 정밀한 저장장치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할 때는, 우선 추상화를 거친 다음 일부분의 중요 자료만을 압축하여 저장한다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암기교육 위주의 대한민국 입시교육 따위는 쌈싸먹을 것이다. 책을 한번이라도 읽으면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기억해 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뇌의 기억 작용은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은 하루 종일 겪은 일에서 일부분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소중한 추억이라고 해도 추상적인 이미지만 보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무리 소중한 기억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특히 어릴 적에 쌓아 왔던 기억들은 나중에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수두룩하다. 단적으로 갓난아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필자는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들은 매우 일부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순간들 속에서 여러가지 느낀 점들을 통해 인격과 자아가 구성된다. 이를 보면, 아무리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건이라고 해도 시간을 되돌려서 없는 일로 만들지 않는 이상 그것은 의미없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소설 본편에 두고 생각해 보자. 주인공 채성윤은 결론적으로 납작이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솔직히 보자면 이 점은 다소 날림으로 처리된 듯한 아쉬움이 있다. 물론 납작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물에 대한 공포를 넘어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약간 묘사가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 어쨌든 이런 점을 무시한다면 이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이 맞다)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납작이와 놀았던 사실조차 잊어버리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인간은 기억만이 존재의 전부가 아니고, 비록 기억을 잃더라도 그 당시에 겪고 느낀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 뿐만 아니라 치매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며칠 전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접했다. 부부 간에 오랫동안 사이가 돈독하던 노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기억을 점점 잃어갔다. 그 도중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치매에 걸린 남편은 종종 아내가 별세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내를 애타게 찾다가 기억이 돌아오면 슬퍼하더라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사실 찾아보면, 필자가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었음에도 자식이나 배우자 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남아 있는 경우를 종종 살펴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증거가 아닐까? 심지어 그러다가 그 감정의 기원조차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 순간의 감정이 진실이었던 이상 의미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테고리 분류에 있어서 살짝 고민했는데, 어쨌든 책을 읽고 나서 느낀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들 카테고리가 아니라 그냥 후기 형식으로 넣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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